난 청량리역에서부터 내내 여기 앉았다구요. 아줌마가 저승에서나 예약했다면 모를까, 아무튼 그런 소린 못 들었으니까.
여인이 잇달아 뭐라고 중얼거렸지만 청년은 할말을 다했다는 듯이 그만 입을 닫고는 한동안 환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작업복을 단정히 입은 그 청년의 시선을 느끼자 환오는 자기가 자릴 잡지 못하고 그의 곁에 엉거주춤 서 있다는 것이 몹시 부끄럽고 죄나 지은 것처럼 곤혹스러웠다.
조금 자릴 좁혀 앉읍시다.
이때 작업복 청년이 뚱보여인에게 말하면서 여자 쪽으로 엉덩이를 밀어갔다.
저분 좀 끼어 앉으시게.
글쎄, 두 사람 자리에 셋이 앉았으면 그만이지 어떻게 더 좁히다는 거요?
여인이 바락 언성을 높여 대들었다.
이렇게 이렇게 좁히면 되지요. 일루 와 앉으세요. 그렇게 서 계실 게 아니구.
작업복 청년이 환오에게 눈짓했으나 환오는 선뜻 앉겠다고 나서지 못했다.
그가 청년의 호의에 도리어 당황하고 있을 때 뚱보여인의 쇳소리 같은 비명이 얼어붙게 했다.
아이쿠, 내 허리 부러지겠네. 이거 생사람 잡지 말고 양보심 많은 당신이나 자릴 비켜주면 될 거 아뇨?
되도록 앉아가자 이겁니다.
청년이 다시 말했지만 뚱보여인은 밀려났던 자리를 쉽사리 다시 점령해버렸다.
손님은 어디까지 가십니까?
자릴 만드는 데 실패한 작업복 청년이 면구스런 표정으로 환오에게 물었다.
만종입니다.
어이쿠, 먼데까지 가시는군요. 실은 저도 동화 까지 가는데요. 저보다 한 정거장 더 가시는군.
청년은 무엇인가 더 말할 게 있지만 차마 나오지 않는다는 듯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어떻습니까? 이런 얘기는 좀 뭣하지마는, 차간에서 초면이라도 서로 좀더 친절하게 대해줬으면, 서로 폼을 잡을 것이 아니라 흉금을 털어놓고 말입니다. 그러면 여행이 훨씬 즐거울 것 같은데요.
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동감입니다. 저도 동감예요.
얼떨결에 환오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작업복 청년은 이제 마음이 놓인다는 듯이 한층 친절한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자릴 잡으셔얄 텐데. 조금 기다리셔야겠군요. 저는 말입니다. 한 달에 한두어 번 과수원 일 때문에 동화역에서 청량리역까지 왕래하게 되는데 청량리서 동화까지 세 시간 반 동안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자니 꽤 지루해요. 그동안에 우연히 말벗을 구하면 한바탕 떠드는 사이에 동화역에 닿거든요.
저는 시골에서 지내니까 이렇게 나들이 할 때나 겨우 말벗을 구하는데 그것도 재수가 좋을 때라야지, 다섯 번 왕래에 한번 꼴도 힘들다니까요. 그런데 선생, 제가 그 도시에 가서 어떻게 하고 오는 줄 아세요? 저는 기껏해야 단지 몇마디,
호리돌 두 포만 주세요.
얼마죠?
부삽 국산품 나왔어요?
포르말린 언제 가져오죠?
이따위 몇마디 지껄이고 돌아오는 겁니다. 아무도 그이상 내게 말을 시키거나 걸어오지 않아요. 참 냉정한 도시라구요. 이러다간 실어증에 걸리기 십상이라니까요. 그러니까 돌아올 땐 솔직이 말해서 고독하기 짝이 없어요. 괜히 위축되고, 그래 아까부터 난 선생을 유심히 지켜봤죠. 말벗을 삼으려고. 그건 그렇고 만종엔 왜 가십니까?
환오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지 머뭇거리는 사이 마침 객차 속으로 열차 판매원이 비집고 들어와서 사람 틈을 빠져나가느라고 소동을 피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