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풍이 심해지고 사람 틈에서 부대끼기 시작하자 침입자들은 그만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벌써 눈이 사태나게 오시는군.
캄캄해진 바깥을 응시하고 있던 단골손님이 근심스럽게 중얼거렸다. 환오는 그와 마주 서 있는 그 사내에게 불현듯,
어디쯤 가면 손님이 많이 내리죠?
하고 물었다. 이 고역에서 빠져나는 길은 아무래도 손님들이 많이 내리는 걸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서였다.
댁은 어디까지 가는데 그러우? 좌우간 이 기차는 묘한 기차가 돼놔서 종점까지 내리는 놈이 거의 없어요. 양평서부터 조금 내리긴 하지만 여기서 양평까지 가는 동안에 그만큼 보충할 테니깐 내리나 마나라구. 그러니깐 원주까지 내내 이모양으로 갈 거요.
이렇게 말한 사내는 마치 환한 곳에서처럼 환오를 잠깐 넌지시 지켜보더니 곧 상대방의 정체를 알았다는 듯이,
보아하니 댁은 초행이군그래.
하고 말했다.
네네. 이쪽은 처음입니다.
그렇다면 정신 바짝 차리슈. 이따가 내릴 곳을 까먹지 않으려거든 잘 물어서 내리란 말요. 지금은 승무원이나 공안원들 내왕도 없으니까 아무에게나 물어서 내려요. 중앙선 정거장 건물들은 모두 비슷해서 혼동하기 십상이고, 지금 밖에 눈이 내리는 게 보이오? 이렇게 눈보라가 칠 때는 더더구나 눈에 뵈는 게 없거든.
사내는 아까 발을 밟히고 투덜거리던 때와는 달리 아주 부드럽게 말했다. 그의 너그러운 어조속에는 중앙선에 관한 것이라면 뭐든지 알고 있다는 자랑이 은근히 숨겨져 있었다.
그런데 댁이 어디까지 간다고 했죠? 당신 아까 내가 그걸 물었을 때 그걸 대답하지 않았지?
저 말입니까? 저 만종까지 가는데요.
단골손님이 또 화를 낼까봐 환오는 황급히 대답했다. 그리고 자기 대답소리를 듣고서야 그는 자기가 지금 만종으로 가고 있다는 걸 비로소 깨달은 것 같았다. 왜냐하면 청량리역 개찰구를 빠져나온 뒤로 당장 발붙일 곳을 뺏기지 않으려고 허덕이다보니 자기 행선지조차 까맣게 잊어버렸던 것이다.
만종이라고?
단골손님은 뭣에 놀란 듯 반문하고는 혼자서 혀를 끌끌 찼다.
그렇다면 게까지 이 구석에서 서서 어떻게 갈 거요. 난 말요. 난 팔당서 내릴 거니깐 조금만 견뎌배기면 되겠지만, 그렇게 멀리 갈 양반이 좀 일찍일찍 서둘러 자리를 잡을 게지, 쯧쯧쯧.
그가 남의 일 같지 않다는 듯이 큰소리로 너스레를 치는 바람에 환오는 자리를 못 잡은 게 무슨 범죄나 되는 것처럼 움츠러들었다.
하기야 너구리잡이들이 설쳐대니까 초행이라면 자리잡기도 힘들 테지.
그런 게 아직도 있습니까?
하, 무슨 소리. 여기서는 역 직원들하고 짜고서 공공연히 해먹는다우. 좌우간 그러니까 웬만큼 빠르게 굴지 않고서는 자리잡기가 힘들다니까.
사내는 중앙선에서 발호하는 너구리잡이들의 횡포에 대해서 난간 사람들이 모두 들을 만큼 큰소리로 계속 떠들어댔다. 그들의 본거지는 어디고 그들이 수작을 걸어올 때의 가지가지 방법이 어떻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가며 얘기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역원과 공모하는 매우 위험스럽고 비밀스런 과정까지 서슴없이 얘기했다.
그가 아는 사실들은 확실히 매우 자상하긴 했지만 그 사실들을 말할 때 사내는 조금도 흥분하거나 분개하는 기색이 없었다. 말하자면 그들의 횡포는 단골손님인 자기 힘으로도 이미 막을 수 없으니까 분개해봤자 소용없다는 투였다.
열차가 덕소 역을 지났을 때 단골손님이 다시 환오에게 말했다.
난 다음 팔당에서 내려요. 그런데 당신은 그꼴로 가다가는 만종에 닿기도 전에 동태가 된다 이 말씀야.
사내는 아무래도 상대방의 전도가 마음에 걸린다는 듯이,
동태가 되지 않으려거든!
하고 전제해놓고 무슨 대단한 기밀이라도 알려주는 것처럼 갑자기 그의 입을 환오의 귀에 바싹 디밀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은 지금부터 어떻게든 이쪽 통로를 뚫고 들어가야 돼요. 갈수록 사람이 늘어나지 줄지 않을 테니깐. 만종까지 이렇게 가다간 정말 동태가 된다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