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노에 가기 전 툴스카야에 머물 때 B 교수가 메일을 보내왔다. 내가 작가 미팅에서 낭독할 내용을 작성해 보내주면 러시아 말로 번역해서 가져오겠다는 것이다. 그 미팅 참가는 본래 내 예정에는 없던 것인데 가브리노에서 A도 내게 참가를 권했다. 여행지에서는 현지인이 권하는대로 따르는 게 상식이다. 나는 교수의 제안대로 십 여 매 정도 원고를 써서 메일로 보냈다. 노트북 컴퓨터를 앞에 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마치 친구에게 문안편지 쓰듯 원고를 금방 작성했다. 글 제목은 <나의 톨스토이>인데 이것도 B 교수 제안이었다.
이 일 때문에 미팅 현장에 갔을 때 나는 한바탕 큰 곤욕을 치렀는데 원고를 보낼 때는 전혀 상상도 못하던 일이었다.
전자상가에서 나는 우랄합창단이 부른 <레비냐의 노래> 외에 트럼펫의 명인인 티모페이 독시처(Timofei Dokshitser)의 음반 한 장을 샀다. 어느 도시나 그렇지만 대형 전자상가라는 곳은 소음과 북적대는 인파로 잠시 한숨 돌리기도 쉽지 않다. 가만히 서있으면 자꾸 떠밀려서 엉뚱한 장소에 서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그 바람에 나는 이 트럼펫 음반의 내용도 미처 살피지 않고 다만 독시처라는 연주자 이름반 보고 음반을 구입한 것이다. 명성이 높은 우크라이나 태생의 이 트럼펫 연주가를 나는 조금 일찍 알게 되었다. 90년대 초, 페테르부르그의 네브스키 사원 앞에 진을 치고있는 음반 노점상에게서 <로라의 추억>이란 부제에 끌려 우연히 그의 음반을 구입한 것이다.
숙소로 돌아와 뒤늦게 트럼펫 음반을 살펴본 나는 그 제명에 적지 않게 실망했다.
<JAPANESE MELODIES>. 이 제명을 그제서야 발견한 것이다. 만약 상가에서 그걸 보았다면 아마 구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이유보다 좋은 트럼펫 곡이나 다른 기악곡 연주를 기대하고 음반을 구입한 것이다. 동양의 민속적 가락을 구태여 트럼펫으로 듣고싶은 생각은 없었다. 독시쳐는 일본 연주를 왔다가 일본적 서정이 물씬 드러나는 이 노래들에 끌려 음반을 낸 것 같다. 나는 흥미를 잃고 음반을 한 구석에 치워놓았다.
며칠 뒤 좀 한가할 때 슬며시 호기심이 생겼다. 어떤 노래들일까? 독시처가 음반까지 낼 정도라면 뭔가 있지 않을까? 나는 그 음반을 컴포넌트에 올리고 볼륨을 작게 조절한 뒤 듣기 시작했다. 여나문 곡의 일본 노래들인데 작곡가가 각기 다르고 <사쿠라>처럼 작곡가 없는 전래 민속곡도 있다. 첫곡 <꽃들>을 듣고 두 번째 곡이 시작될 때 나는 갑자기 몸이 얼어붙은 듯 긴장했다.
<이른 봄의 노래>. 이 노래 선율은 내가 알고 기억하는 선율이었다. 나는 그 노래의 가사까지도 한 줄 빠트리지 않고 잘 기억해냈다.
봄이란 이름 뿐
바람은 차고 차다.
산골에 꾀꼬리는
옛 노래 생각나도
때 아닌 노래라고
부르지도 않고
때 아닌 하얀 눈만
쓸쓸이 내리네.
약간 쓸쓸하고 처연한 느낌을 주는 멜로디가 트럼펫의 금속성 음향에 실려 좁은 거실 안을 가득 채웠다. 노랫말까지 기억하는 걸 보면 한때 나는 이 노래를 무던히도 열심히 불렀던 것 같다. 나는 광복 이듬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에 학교에서 이런 노래를 배우지는 않았다.
이 노래를 내게 가르쳐준 사람은 나와 일곱 살 터울인 나의 셋째 형이었다. 형은 오르간도 잘 치고 피아노도 다룰 줄 알았던 음악 지향의 소년이었다. 그런데 재능이 출중하면 질투의 악신이 따르는지 그는 열일곱 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것도 병사나 단순 사고사가 아닌 참혹한 학살의 희생물로 짧은 생을 끝냈다. 내 기억으로는 그가 떠난 이후 나는 <이른 봄>을 한 차례도 불러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거의 60년 만에 모스크바 변두리의 허름한 아파트 거실에서 그 노래와 다시 만난 셈이다.
우연이 겹친 것은 내가 러시아여행을 떠나기 직전까지 형의 죽음을 다룬 작품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작품은 조급증으로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부실한 점이 많이 드러나 일단 출간을 보류하고 여행길에 오른 것이다.
육이오가 나기 바로 한해 전에 그 불행한 사건은 발생했다. 내가 열 살 때, 초등학교 4학년 때다. 7월 여름 한낮인데 내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홀로 옆 뜰 배추밭 사이 고랑에서 서성이며 뭐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계셨다.
표정이 불안으로 가득했다.
무슨 일이야? 어머니.
네 형이 타고 가던 버스가 고갯길에서 공비(빨치산으로도 불렸다)에게 습격당해 몇 사람이 산으로 끌려갔단다.
이것 밖에 다른 말은 떠오르지 않는다. 형은 연습하던 바이올린 줄이 끊어져 그걸 사기 위해 아침 일찍 광주행 버스에 올랐다.
열일곱 살 소년이 시골 작은 읍에서 처음으로 읍의 경계선을 벗어나 바깥 세상으로 나가는 여행길에 오른 것이다.
형이 정류장으로 가기 위해 조반을 서둘러 먹고 깨끗이 세탁된 옷으로 갈아입고 있을 때 나는 형 옆에 붙어 앉아 나도 형을 따라 광주라는 도시에 가겠다고 마구 떼를 썼다. 다른 동생들도 있는데 유독 나만 형에게 매달렸다. 옳지 않은 행동에는 불 같이 화를 내는 형이지만 이유가 정당하면 늘 관대하고 너그럽던 형이었다.
-네가 광주에 가려는 이유가 뭐야?
-좋은 공책(노트)도 사고 연필도 살려고 그래. 여긴 그런 게 없어.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네 공책이랑 연필이랑 아주 좋은 걸로 사다 주기로 하면 어떠냐? 약속할게.”
-정말이야? 형.
-약속한다니까. 이렇게.
형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고 우리는 서로 손가락을 걸고 굳게 약속했다.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어머니의 불안한 표정, 몇 마디 말에서 나는 이미 뭔가 크고 무거운 쇠망치 같은 것이 가족과 나의 정수리를 세게 내려친 듯한 절망의 기운을 느꼈다. 세상에 대한 전망, 이웃들에 대한 친애감이 내 머리와 가슴에서 그때부터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작품을 쓰기 전 취재를 위해 당시 버스에 동승했던 형의 동기생을 수소문 끝에 광주에서 만났다. 은퇴를 앞둔 은행의 임원으로 있던 그를 찻집에서 만나자 말자, 나는 대뜸 물었다.
“같은 또래인데 00 님은 살아남고 형은 그렇게 되었는데 그 기준이 뭐라 생각하십니까?”
“나도 일단 버스 바깥으로 끌려나갔다가 대장 지시로 풀려났네. 자네 형제 중에 잠시지만 경찰관 옷을 입은 형이 있지. 원인은 그거라고 봐. 자네 부친은 덕망 있는 교육자인데 이유가 될 수가 없지.”
은행 임원은 마치 오래 전 우화를 설명하듯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한마디 더 보탰다.
“참, 그 사람들이 내 숙부님이 진짜 고참 경찰관이었던 걸 알았다면 어땠을까? 가끔 그 생각하면 머리끝이 오싹하지. “
내 위로 형들이 몇 사람 더 있다. 우리 집엔 형제들이 누이 셋을 포함하면 축구팀 하나를 만들 정도로 많았다. 그 형들 가운데에는 <카라마조프네 형제들>의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가 다 있었다. 모두 그 배역에 썩 잘 어울리는 인물들이다. 성격상 다소 미약하고 애매한 배역이지만 스멜쟈코프도 있다. 알료샤는 세째 형이고 그는 비록 소년으로 삶을 끝냈지만 누구보다 이 배역에 걸맞는 인물로 기억된다.
둘째인 이반은 목포에서 가족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당시로는 도시 유학에 해당되는 학창 생활을 보냈지만 이렇다 내세울 취미도 지향점도 없는 무성격의 인물로 성장했다. 그는 향리에서 부친의 도움으로 잠시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다 그만 두고 드미트리가 있는 서울로 갔다. 서울에서 초등교사로 있던 드미트리 옆에서 식객으로 머물던 그는 어느 날 경찰 간부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전시가 되어 진급이 빠르고 출세의 지름길이 될 거라는 것이다.
가족들이, 내 기억으로는 특히 부친과 알료샤가, 맹렬히 반대했지만 이반은 육 개월의 경찰 간부 교육을 마치고 어느 날 금빛 견장이 번쩍이는 제복을 입고 가족 앞에 나타났다. 그는 장성의 지서장으로 부임했으나 산 손님들의 출몰이 빈번했던 당시 상황을 더 버텨내지 못하고 불과 삼 개월만에 사표를 내던지고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왔다. 이반은 그 이후 다시는 경찰 근처에도 얼씬대지 않았다.
이반은 알료샤의 죽음에 어떤 자책감을 갖고 있었을까? 누구도 그에게 그것을 따져 묻거나 그를 탓하지 않았다. 망각이라는 좋은 치료제가 없다면, 비록 완전한 치료제는 아니지만, 우리 모두는 미쳐버렸을 것이다. 성격이 쾌활하고 특히 사교성이 좋은 이반은 친척들로부터 언제나 가장 좋은 평판을 받았다. 형제인 나조차 광주에서 셋째 형의 친구였던 그 은행 임원을 만나보기 전까지 그 오랜 기간 동안 알료샤의 비극의 직접 원인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일조차 없었다.
톨스토이 영지인 야스나야 팔리아나는 모스크바에서 차로 네다섯 시간 걸리는 꽤 먼 거리에 있다. 웬만큼 지극한 열정이 없다면 외국 여행자가 일부러 찾아가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가는 길목 끝무렵에 큰 도시인 뚤라가 있는데 이곳에 톨스토이 재단 사무국과 출판국이 자리잡고 있다. 작가 미팅이 시작되는 하루 전 날 영지로 가기 위해 A와 엘레오노라, 그리고 나와 B교수는 모스크바에서 합류해 전세버스가 출발하는 교외지역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