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응하라. 잠시의 굴욕을 견디고 순응하면 복이 돌아올 것이다.
저항하라. 굴욕을 뿌리치고 저항하면 크고 무거운 재앙이 다가올 것이다.
7년의 어이없는 도피생활에서 내가 배운 교훈이다. 이 7년 동안 나와 대학동기이자, 사관후보 동기였던 한 친구는 대위로 의무연한을 무사히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가 학위를 받고 돌아와서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대학은 다르지만 어떤 친구는 비슷한 과정을 밟고 뒷날 국내 굴지의 대학의 총장도 되었다. 총장이 된 그 친구는 나와 신장이 비슷해서 훈련 받을 때 언제나 내 곁에 있었기 때문에 얼굴도 목소리도 잘 기억할 수 있었다.
그 7년 동안 나는 여관의 조바, 짜장면 한 그릇 값의 시급을 받는 변두리 아동미술원의 동화 강사, 역시 변두리 아이들 몇을 모아 가르치는 싸구려 가정교사 등을 전전했다. 그나마 할 일이 있으면 다행이었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할 일 없이 거리를 배회했다.
복개공사가 시행되기 이전의 청계천 6가, 영미교가 있던 부근의 바라크-물 위에 기둥을 세우고 거기에 방을 만든 수상(水上)의 집-에서 한 해 봄과 여름, 가을을 살았던 경험도 있다. 거기서는 굶주리는 날이 많았다. 결국 길가에서 파는 싸구려 음식을 허겁지겁 과식하다 급성위염에 걸려 반년 가까이 고생을 했다.
마지막 직업이 고양의 신설 공립중학의 영어교사였다. 시급제 동화강사에 비하면 크게 출세한 셈이다. 그러나 주민등록제가 시행되면서 신분이 탄로나서 수업중인 교실에서 체포되었다. 헌병대가 소재를 알고 학교까지 찾아온 것이다. 그날로 동물원 우리를 닮은 사령부 교도소의 독방 하나가 내 차지가 되었다. 만원사례였던 그곳에서 다만 초기 며칠 동안만 나는 독방에 격리 수용되었다가 며칠 뒤 동료들이 가득 찬 일반 감방으로 옮겨졌다.
독방에 있는 동안 나는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 재미있는 경험을 했다. 밤인데 환청으로 바흐의 <첼로 무반주 모음곡 6번> 전곡을, Prelude 에서 Gigue까지 멈추지 않고 들었다. 처음엔 환청인줄 모르고 구내 천정 같은데 매달린 라디오에서 들리는 소리인줄 알았다. 관망대 위에 감시 헌병이 앉아 졸고 있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라디오 같은 건 없었다.
전곡은 23~24분이나 걸리는 곡인데 시작부터 종료까지 완벽하게 들었다고 볼 수는 없고, 아마 곡의 흐름을 따라 대충의 윤곽을 들었을 것이다. 그때 내가 아는 것은 이 모음곡의 6번뿐이었다. 그나마 단 한 차례, 그것도 음악실의 문 밖에 서서 들은 것이다.
구금되기 바로 며칠 전 나는 명동성당 입구에 있는 작은 음악실 <크로이첼>에 갔다가 미처 입장하기 전에 문 밖으로 흘러나오는 그 음악을 들었다. 카잘스 연주인데 난생 처음 듣는 음악이었다. 그 음악실에도 오직 6번만을 수록한 낡은 음반 한 장이 있을 뿐이었다.
그 음악을 듣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나는 음악실에 입장하지 않고 거리로 나와서 한동안 길을 걸으며 방금 들은 음악을 한없이 반추하고 또 반추했다. 그런데 한 차례 들었을 뿐인 이 음악이 독방에 앉아있는 시간에 거의 전체의 윤곽으로 환청을 통해 나를 다시 찾아온 것이다.
음악적 감수성과 기억력이 뛰어나서? 그런 것은 아니다. 나는 스스로 보통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일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두 번 다시 발생하지 않았다. 이유는 다른 데 있을 것이다. 자신이 절실하게 원하고 갈구하면 그것을 누군가가 슬쩍 손에 쥐어준다. 그게 신의 소행이라고 할 수도 있고 사람의 뇌파가 지닌 특수능력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순간에 왜 그 음악을 갈구했나? 나는 위안과, 비참한 자기 존재의 고양(高揚)을 간절하게 원했을 게 틀림없다. 위안과 자기 존재의 고양은 그 음악의 으뜸가는 미덕들이다.
그곳, 동물원의 우리를 닮은 그 사령부 교도소에 갇혀있는 동안 나는 두 가지 소망을 품고 있었다. 첫째는 내가 가르치던 아이들에게 돌아가 내가 파렴치범이 아닌 걸 입증하는 것, 두 번째는 가급적 가까운 장래에 <크로이첼>로 찾아가서 이번에는 돈을 낸 당당한 손님으로 실내에 입장하여 느긋하게 그 음악을 감상하는 것이다. 나는 이 두 가지 소망을 완전하게 이루었다. 그것은 7년의 고행 끝에 내가 얻어낸 적지 않은 행운이었다.
A는 너무 많이 변해버렸다. 적어도 7년 전 내가 만났던 그 사람은 아니다. 그 사이 A가 서울에 두어 차례 다녀갔지만 손님으로 왔기에 그런 내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변화무쌍한 것은 예술가의 특권인가? 나는 작가가 예술가 범주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A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기도 하니까 다소 변덕을 부려도 용인되는 것일까.
“나와 엘레오노라, 곧 헤어질 거요. 우리가 함께 있는 걸 보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거요.”
식사를 끝낸 뒤 거실에서 차를 마실 때 A 가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는 서울에서도 들은 바가 있다. 엘레오노라는 카자흐에 근거가 있고 전 남편과 사이에 낳은 자녀들이 그곳에 있기 때문에 카자흐로 돌아가 살기를 원한다. 친구들도 모두 그곳에 있을 것이다. 엘레오노라에겐 러시아가 낯선 외국이다.
“두 분이서 카자흐를 자주 방문하면 엘레오노라에게 위안이 되지 않을까요?“
“흠, 엘레오노라, 여기도 싫다 하고 가브리노 다차도 관심 없어. 우린 같이 살 수 없어. 나는 가브리노에서 살 생각인데 엘레오노라는 거기 아주 싫어해.”
가브리노를 싫어하는 엘레오노라의 심정을 알 것도 같다. A에게 그곳은 한 시절 칩거하며 러시아 중남부 지방의 토속어를 익히고 창작의 꿈을 키우던 추억의 땅이지만 엘레오노라에겐 벗할 만한 친구 하나 없는 황량한 촌락일 뿐이다. 서로 눈이 맞아 열정이 뜨겁게 달아오를 때는 각자 지역에 매어있는 자기의 기반을 따져볼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중년을 훌쩍 넘긴 나이인데 처음부터 너무 무모한 결합이 아니었나. 내가 그 점을 지적하자, A 도 할 말이 없다는 듯 히죽거리며 웃기만 했다.
다음날 엘레오노라가 A 혼자 나를 접대하는 일이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입원해 있는 병원을 나와 잠시 집에 들렀다. 그녀 입장에서는 내게 인사라도 하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수술을 할 정도로 한쪽 팔을 많이 다쳤다는데 겉으로는 크게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 제가 수술 마치고 내일, 아니 모래는 집에 옵니다. 그때 잘 모실 게요. 여기 파스테르나크 기념관, 아주 가까워요. 에푸뚜셍코 기념관은 더 가깝고요. 제가 천천히 안내해 드릴게요. 여기 머무시는 동안 마음 푸욱 놓으세요.”
“가브리노에 먼저 갈 건데...?”
A가 쌀쌀맞은 눈길로 아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 가브리노 가셔야죠. 그럼 가브리노 다녀오신 다음에 여기로 또 오세요. 참, 니나! 니나가 선생님 많이 기다리겠어요. 저는 선생님 이해합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엘레오노라가 상대를 배려하는 너그러운 웃음을 입가에 흘렸다.
“아, 저는 아무래도 괜찮아요. 팔부터 먼저 치료하셔야죠. A가 요리를 잘 해서 아주 잘 먹고 있습니다.”
“낼 모래 수술 끝내고 퇴원하면 더 잘 해드릴 수 있어요.”
엘레오노라는 내게 미안한 감정을 표현하느라고 애썼다. A는 약간 화난 듯한 생뚱한 표정으로 엘레오노라와 나의 대화를 듣기만 했다. 엘레오노라는 국수를 삶고 새로 가져온 야채로 그날 점심 식탁을 마련해주고 병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엘레오노라가 내게 큰 빚을 진 듯, 유독 잘 대해줄려고 애쓰는 데는 이유가 있다. 2008년 그들 부부가 서울에 왔을 때 나는 가브리노에서 그들 부부가 내게 베풀어준 친절에 다소나마 보답하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나 자신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다른 능력이 없다. 나는 마침 정치적으로 딜레마에 빠져 곤욕을 치르고 있던 M에게 도움을 청했고 M은 기꺼이 내 청에 응했다. 07년 대선에 나와 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M은 비록 대선에는 실패했지만 당시 아직 현역 의원 신분은 유지하고 있었다.
M은 A 부부를 저녁 만찬에 초대했다. 그 자리에는 수입화장품 회사를 운영하는 후배작가 J도 엘레오노라에게 선물로 전할 독일 유기농 화장품 한 세트를 휴대하고 참석했다. 대학시절 시를 써서 상을 받기도 했다는 M은 A 부부를 극진히 예우했다. 이 자리가 계기가 되어 M은 한국의 자연을 화폭에 담아보고 싶다고 늘 말하던 A가 천리포 수목원에 한 달여 머물며 주변 바다풍경을 스케치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기도 했다.
이때 그린 그림들을 가지고 A는 지난해 화집도 내고 모스크바에서 전시회도 개최했다. 페레델키노 A의 서재에서 나는 A가 보여주는 전시회 관련 사진들을 여러 장 구경하기도 했다.
이렇게 따져보면 정작 내게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엘레오노라가 아니라 A 자신이다. 그런데 A의 얼굴에서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남편의 변덕을 잘 아는 엘레오노라는 그게 몹시 불안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