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레델키노 작가촌에서 이틀을 묵었지만 A는 좀처럼 가브리노에 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자말자, 그는 냉랭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오늘 가브리노 못 간다. 허리가 아파서...”
A는 소파에 앉은 채 자기 허리를 손으로 잇달아 주물렀다.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봐야겠어.”
나는 여러 가지로 운이 좋지 않은 편이었다. 손님으로 왔는데 주부는 팔을 다쳐 병원에 입원해 있고 A는 허리가 아프고 갈비뼈가 이상해서 숨쉬기조차 힘들다고 말하고 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도 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가브리노는 경우에 따라 종일 달려가야 하는 먼 길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가브리노에 갈 수가 있을까?
그러나 한편으로 A의 증상에는 뭔가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A는 기분에 따라 아주 건강하고 활달한 사람처럼 행동하기도 하고 갑자기 병약한 노인으로 변해서 신음소릴 토해내기도 한다. 나를 대하는 표정이나 말씨에도 변화가 잦았다. 기분이 좋을 때 그는 말했다.
“고리끼 문학대학 제자 한 사람 내일 오라고 했어. 내가 운전 힘드니까 그가 운전하고 가브리노 함께 갈 거요.”
A는 젊을 때 미술대학을 그만두고 고리끼 문학대학에 다녔고 훗날 거기서 강의를 맡기도 했다.
“그 친구 감각이 예민해. 나중에 당신 작품 러시아어로 번역할 때 그 친구 도움이 될 거요.”
그러나 몇 분 지나지 않아 A는 말을 바꾸었다. 그는 호흡이 어렵다는 듯 가쁜 숨을 몇 차례 몰아쉰 뒤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말했다.
“그 친구 내일 오지 말라고 그랬어. 아무래도 내가 병원에 먼저 가봐야겠어.”
크세니아 카스파로바(Ksenia Kasparova)- 멋진 이름을 가진 이 젊은 아가씨는 자기 이름이 주는 느낌 만큼이나 마음이 순수하고 용모도 단정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던가. 대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 러시아 규수의 눈빛은 맑고 은근했다. 신장은 170 정도, 거기에 알맞는 체형을 가진 여성이었다. 페레델키노에 머물던 며칠의 기억 가운데 유일하게 즐거웠던 시간을 내게 베풀어준 이름이다. 둘째 날 아침부터 A는 서재를 정리하고 현관을 청소하느라고 부산을 떨었다.
코 밑의 수염도 가지런히 정리하고 셔츠도 새 걸로 갈아입었다. 예술계통의 잡지사 여기자가 얼마 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한국 풍경 스케치 전시회와 관련된 인터뷰를 하려고 이곳을 방문한다는 것이다. A는 새로 구입한 일본제 지프형 승용차를 타고 기차역으로 여기자를 데리러 갔다.
잠시 후 키가 늘씬하고 인상이 깨끗한 여기자와 함께 그가 돌아왔는데 A의 밝은 표정과 활달한 동작을 보면 그는 호흡곤란을 느낄 정도로 아픈 사람 같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서재에서 인터뷰를 하는 동안 나는 A의 권유에 따라 바깥 차도로 나가서 혼자 산책을 했다. 두 시간 가까이 걷던 길을 다시 걷고 또 걸으며 시간을 때운 뒤 처소로 돌아왔는데 인터뷰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거실에 앉아 있는데 A의 말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A는 자기 작업에 관해서는 무섭도록 철저한 집념을 보여줬는데 그런 점은 배울 점이라고 생각되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두 사람이 거실로 나왔고 A가 여기자를 내게 소개했다. 탁자를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 잠시 차를 마시는데 여기자가 조그만 카메라로 갑자기 나를 몇 컷트 찍었다. 크세니아는 양해를 구하는 대신 호의가 담긴 밝은 미소를 내게 보냈다. 받은 명함을 보니 크세니아의 능력이 만만치 않았다. 미술비평가, 사진작가, 패션 디자이너, 이 세 가지 명칭이 나란히 표시되어 있다. 크세니아는 틈만 나면 나를 여러 각도에서 카메라에 담았다. 이런 때는 당황스럽긴 하지만 기분이 언짢지는 않았다. 도리어 신경이 날카로운 A가 기분을 상하지나 않을까 걱정되었다.
“선생님 작품, 러시아어로 번역된 걸 구할 수 있을까요?“
여기자가 짧은 영어로 내게 물었다.
“아, <네바>, 페테르부르그에서 나오는 <네바>라는 문학지에 짧은 단편 하나 소개된 것 있습니다.”
나는 이 답변을 하면서 조금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번역된 그 단편이 썩 내세우고 싶은 작품이 아닌 것이다. 리얼리즘이라는, 낡고 퇴색된 용어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 '감방 소설'을 좋아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단편은 07년 미국에서 출간된 내 단편집에는 끼지도 못했다. 번역자가 아예 제쳐놓은 것이다. 이 번역자는 이 번역으로 04년 미국 펜클럽에서 우수번역상을 받은, 문학적 안목으로도, 번역능력으로도 출중한 인물이었다.
“이메일로 그 작품이 게재된 잡지 호수를 저에게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아, 가능합니다. 제가 한국에 돌아가면 이메일로 곧 보내드리죠.”
“꼭 보고 싶군요. 그 작품.”
크세니아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녀는 나와 더 많은 대화를 하고 싶어하는 표정이었다. 그 눈이 계속 나를 관찰했다.
그런데 이 여기자는 뜨내기인 내게 왜 그런 관심을 보였을까. 아마 A가 내가 없는 사이에 니나 얘기를 들려줬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다.
“글쎄 저 까레이 작가가 니나를 찾아서 이 바쁜 세월에 서울에서 여기까지 왔지 뭡니까?”
A의 이 한마디에 크세니아는 기자 본능으로 이방인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부쩍 솟구쳤을 것이다. 그녀는 내게 관심을 보이면서도 A를 충분히 배려했다. 만약 A가 없는 자리라면 그녀는 이렇게 묻지 않았을까?
“선생님에게 니나는 어떤 존재였죠?”
혹은
“이 먼 길을 니나의 무덤을 찾아오신 이유가 뭐지요?”
보기에 따라 무례한 질문이지만 기자라면 가능할 수 있다.
그런데 이날 인터뷰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고 A이기 때문에 차마 거기까지 나가지 못한 것이다. 크세니아의 조심성과 밝은 품성이 그런 무례를 억제한 것이다. 크세니아는 앞뜰로 나와 헤어질 때까지 계속 내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A는 그녀를 다시 차에 태우고 기차역까지 데려다주었다.
크세니아가 내 프로필을 여러 차례 카메라에 담은 것, 그리고 러시아말로 옮겨진 유일한 단편 하나를 꼭 봐야겠다고 하는 것은 그녀에게 어떤 의미와 용도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A로부터 니나 얘길 듣는 순간 예술잡지 기자인 그녀 머리에 내가 미처 생각도 못한 기발한 발상이 떠올랐을 수도 있다. 아무튼 크세니아와 마주했던 길지 않은 그 시간은 잠시 가브리노 행에 대한 시름을 잊고 유쾌하게 지냈던 시간이었다.
오후에 A는 자기 몸 상태를 진단받기 위해 나와 함께 차를 타고 가까운 병원을 찾아갔다. A는 갈비뼈 상태를 보기 위해 아무래도 엑스레이를 찍어봐야겠다고 말했다. 병원은 엘레오노라가 입원해 있는 곳과는 다른 곳으로 한국의 지방 보건소를 연상시키는 작고 허름한 단층 건물이었다.
그래도 마당이나 건물 복도는 진료를 위해 찾아온 환자들로 북적거렸다. 옷차림이나 행색이 대부분 변두리 빈곤층으로 보였다. 병원 복도는 사람이 많은데다 휠체어에 앉아 길을 막고 있는 환자도 있어서 통행이 불편할 정도였다.
A가 현관 접수구에서 표를 받고 어떤 방으로 들어간 뒤 나는 건물 밖으로 나와서 기다렸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데 비를 피할만한 마땅한 장소도 없었다. 마당에는 벤치 하나도 없었다. 나는 비를 조금씩 맞으면서 처마 밑에 웅크리고 서서 A를 기다렸다. 한 시간이 지났는데 A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제발 A의 가슴뼈에 이상이 없어야 할 텐데.’
지루한 기다림 끝에 A가 현관 밖으로 나왔다. 나는 그의 입을 쳐다봤다. 그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차례가 오자면 저녁까지 기다려야겠어. 오늘은 안 돼.”
‘그럼 내일 다시 이곳에 와야 되나?’ 이런 말이 저절로 떠올랐으나 나는 A에게 묻지는 않았다. 우리는 차를 타고 시내 쪽으로 나갔다. 가는 길목에 아주 큰 정교회 건물이 있었다. 그 교회당을 지나칠 때 A는 재빨리 오른손으로 성호를 그었다. 처소에서 차를 타고 출발할 때도 A는 잊지 않고 성호를 그었다. 2005년 내가 A를 처음 만났을 때는 하지 않던 몸짓이다. 나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그때 다차에서 내게 신앙을 물었다. 내가 무종교라고 말하자, 그는 매우 실망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럼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된 게 누구 조화라고 생각하오?”
그 말에 나는 웃음만 지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마치 알기라도 한듯 정교회 건물을 지나 100미터쯤 달렸을 때 A가 자기의 신앙 자세가 근래 더욱 돈독하게 변했다는 취지의 얘길 들려줬다. 교회의 기도회나 강습회 같은 데 최근 참여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었다는 얘기였다.
서울에서 누군가가 '자기 믿음이 더욱 굳어졌다.'고 말하면 나는 그 사람과 나 사이의 벽이 더욱 높아졌다고 본능적으로 느낀다. A의 얘길 듣고 난 기분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