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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한국의 원로작가가 러시아를 찾는다. 방문 목적은 니나 그리고르브나를 만나는 것이다. 하지만 니나는 이미 고인이 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여성이다. 젊은 시절의 불타는 로맨스를 함께 나누었던 사이도 아니다. 두 사람이 만났을 때는 이미 청춘의 설레임은 머나먼 추억으로만 남는 그런 연배였다. 하지만 이 작가는 그 여인의 무덤을 찾아서 수만 리 길을 날아왔다. 그가 날아온 그 거리보다, 러시아에 도착해서 니나의 무덤까지 찾아가는 길이 훨씬 더 멀고 험하다. 그 거리는 바로 작가가 니나를 만나고자 하는 이유와 거기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이해 사이에 놓인 거리이다. 러시아의 유명한 작가조차 그 빈 공간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오히려 냉랭함의 벽을 높일 뿐이다. 독자가 작가의 이 여정을 따라가는 길은 이정표도 나침반도 없다. 그냥 함께 러시아 초원의 무성한 풀들을 헤치고 나아가고 머나먼 고국의 기억이 이따금 교차할 뿐이다. 단지, 이 여행에는 목적지가 있다는 것, 그 여행의 목적지를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이 작가 한 사람뿐이라는 사실이 작가와 독자를 외롭게 이어주는 끈이다. 하지만 그 끈은 결코 작가와 독자를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기대가 작품의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 사이에 머나먼 새벽별처럼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