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여행 목적을 정직하게 말한다면 첫째가 니나를 찾아가는 일이다. 그런데 내가 가브리노 북망산에 잠들어 있는 니나를 찾아 이 바쁜 세월에 여기까지 왔다고 하면 르노 자동차 회사의 이 엔지니어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는 왠지 그 말을 꺼내는 게 내키지 않았다. 무엇보다 장황한 해명이 필요할 것이다. 마치 개인의 기호에 따라 불필요한 사치를 감행한 사람처럼 변명해야 한다.
“아, 이곳에 친구가 있어요. 그를 만나 의논할 일도 있고, 그리고 전에 한동안 지내던 마을도 다시 찾아가 보고 싶어서요. 툴스카야라고.”
나는 아주 간명한 답변을 쉽게 찾아냈다.
“추억 여행인가요?”
셋 가운데 가장 젊어 보이는 르노차 직원이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맞습니다. 결국 그런 셈이 되겠네요.”
세 사람의 엔지니어들은 대충 이해하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일찍 잠자리에 들기 위해 모두 일어서서 각자 자기 방으로 갔다. 그들은 현지 시간으로 새벽 여섯시가 되면 출근해야 하는 바쁜 사람들이었다.
<사진> 가브리노의 호수 - 건너편에 니나가 살던 마을이 있다.
여행지의 첫 밤을 잘 쉬고 나는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오늘은 지하철을 타고 툴스카야로 가야 한다. 그 거리와 드디어 재회한다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설레었다. 지하철 약도를 책상 위에 펼쳐놓고 황색선에서 회색선으로 갈아타는 지점의 역 이름을 눈여겨 봐두었다. 노브이 체르므쉬끼 역에서 툴스카야 역까지는 이십분, 좀 여유 있게 잡아도 삼십 분이면 갈 수 있을 것이다.
“선생님. 오늘 날씨 아주 춥습니다. 저어기 바깥을 보세요. 사람들이 두꺼운 옷들을 입고 나온 걸요.”
조반을 먹으려고 주방으로 나갔는데 주방 아주머니가 몹시 걱정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주방에 붙은 베란다 창을 통해 거리를 내려다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출근길을 서두르는 행인들이 모두 두터운 겨울 외투를 입고 있었다.
“아주머니. 어디서 내복을 구할 수 없을까요? 러시아 사람들 내복 입지 않는 걸 알지만.”
“근처에는 없을 거에요. 중국시장에나 가면 모를까. 근데 거긴 멀어요. 가 봐도 내복을 살 수 있을지 장담 못해요.”
북국의 변덕스런 날씨는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제법 따뜻했는데 갑자기 이리 추워진 거랍니다.”
마음씨 착해 보이는 주방 여인이 커피와 식빵 두 조각을 식탁 위에 가져다 놓으며 말했다. 커피와 식빵은 내가 주문한 아침 식단이었다.
“아주머니는 러시아 말을 아주 잘하시네요.”
주방여인이 아침부터 스마트폰을 들고 러시아 말로 누구와 대화하는 걸 들었다.
“아이, 그냥 필요한 말은 조금 해요. 어려운 말은 못하고요.”
“아이구, 부럽습니다. 여기 오신지 몇 해나 되었는데요?”
“벌써 십년이네요.”
“처음부터 모스크바에?”
“아니에요. 연변에서 나와서 처음 볼가그라드에서 옷장사를 했어요. 여기 온 건 이제 삼년, 그쯤 되네요.”
“아, 볼가그라드... 이차대전 때 격전지로 유명하던 곳이죠. 한때 스탈린그라드로 불리기도 했고.”
“거기서 옷 장사를 오래 하다 장사가 잘 안 되어 그만두고 이곳으로 왔지 뭐에요. 장사를 하다 보니 말이 조금씩 늘데요.”
조반을 마치고 나는 가을 양복을 꺼내 입고 외출을 서둘렀다. 주방여인이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지켜봤다. 그녀는 아래층 입구의 출입문을 드나들 때 필요한 절차를 내게 꼼꼼하게 가르쳤다. 출입문에는 비밀 숫자가 있고 별도의 문자표시가 부착되어 있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때 그것을 차례대로 입력하지 않으면 육중한 문은 결코 열리지 않는다. 이건 한국과 다를 것이 없다.
내가 현관을 나서는데 늦잠에서 방금 깨어난 집 주인 이진이 놀란 얼굴로 뛰어나왔다.
“선생님, 날씨가 너무 추워 안 돼요. 툴스카야는 날씨 좀 풀리면 제가 차로 모실게요. 감기 드시면 여기서는 약 구하기도 어렵다구요.”
나를 걱정해주는 이 조선족 젊은 여성의 마음이 고맙지만 그렇다고 첫날부터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나갔다가 너무 추우면 금방 돌아오겠소. 그래도 여기 땅은 밟아봐야지.”
“그러세요, 그럼. 절대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5층에서 엘리베이타를 타고 내려와서 나는 건물 바깥으로 나왔다. 날씨가 어제보다 더 추웠다. 이런 날씨라면 툴스카야에 가더라도 느긋하게 산책을 즐기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아파트 구역을 벗어나 행길로 나가서 지하철 역 방향으로 천천히 걸었다. 사람들이 내 옆을 분주하게 스쳐 지나갔다. 모두들 두터운 외투를 입고 있다. 외출 한번 하는데 이처럼 비장한 마음을 갖게 된 건 처음이다.
길 한편에 작은 규모의 끼오스끄가 있고 그 건너편에 여러가지 과일을 잔뜩 쌓아놓고 손님을 부르는 과일 노점상이 있다. 어느 곳이나 변두리 마을의 풍경은 비슷하다. 여기에도 비둘기가 있었다. 비둘기들과 참새들이 나무숲에서 자리를 옮겨다니며 풀씨를 쪼아 먹고 있었다. 참새들조차 사람이 다가가도 놀라거나 피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나는 잔디밭에서 풀씨를 쪼아 먹고 있는 참새들을 아주 가까이 서서 오래도록 지켜봤다.
지하철 역 부근은 언제나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로 붐빈다. 지하철로 들어가는 지하도 양켠에는 작고 볼품없는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데 모스크바 서민들은 이 지하도 가게들을 유난히 애용하는 것 같다. 값이 싸기 때문일까? 큰 시장까지 가는 게 번거롭기 때문일까? 이 가게에는 손수건과 양말, 머플러와 질이 낮은 스웨터, 역시 질이 낮은 선글라스와 손톱깎이와 머리빗 등의 잡동사니들이 진열되어 있다. 주로 많은 여성 고객들이 가게 앞에 진을 치고 서서 물건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나는 일단 지하도를 지나 맞은편 넓은 광장으로 건너갔다. 지하철을 타더라도 현금이 있어야 한다. 광장에는 큰 상가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 2층 한쪽 모퉁이에 환전소가 있었다. 환전소는 어느 곳이나 구조가 비슷하다. 전당포 창구처럼 고객과 주인 사이에 볼펜 굵기의 쇠창살이 가로막고 있으며 돈 거래는 창살 아래쪽에 터널처럼 뚫려 있는 좁은 공간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러시아 남쪽 회교권 출신으로 보이는 두 젊은 남자가 창구 앞에서 서성이고 있다.
잠시 후 그들이 환전을 끝내고 자리를 떠나자, 나는 창구 앞으로 가서 백 달러 지폐 몇 장을 내밀었다. 사십대 중년 여인이 내 얼굴을 힐긋 한번 쳐다보고 달러를 받아 그 중 한 장을 책상 위에 펼쳐놓고 현미경으로 꼼꼼하게 살펴봤다. 아마도 그들 나름으로 위폐 여부를 쉽게 식별하는 기준이 있을 것이다. 100달러는 대충 3,200 루블, 루블의 가치가 한때 폭등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공교롭게도 7년 전과 환율이 크게 다르지 않다. 루블을 건네준 여인은 나를 향해 알 듯 모를 듯한 눈인사를 건넨다.
광장에는 햇빛이 비치고 있지만 여전히 싸늘한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냉기를 실은 바람도 멈추지 않고 불었다. 바람을 피해 나는 건물 모퉁이로 가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 추운 날씨에 툴스카야엘 가야 할까? 그 해답을 얻는데 십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나는 툴스카야 행을 단념하고 지하도를 다시 건넜다. 민박집 주인 이진의 충고를 따르기로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