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곡이 심한 숲 사이 길을 차가 마치 널뛰듯 요동치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이런 험한 길은 난생 처음이었다. 몸의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나는 손잡이에 매달렸다.
‘낙원으로 가는 길은 역시 쉽지가 않구나.’
나는 혼자 생각했다. A도 좀 민망했던지 뒤를 흘깃 보며 중얼거렸다.
“당신 이젠 집에 못 가요.”
엘레오노라가 웃었다. 그 말은 지옥길에 한번 빠졌으니 나는 서울 집에 돌아갈 수도 없게 되었다는 말이었다. 농담이지만 내겐 진담처럼 들렸다.
차는 2~3킬로의 지옥길을 겨우 벗어나 조금 평탄한 숲길로 나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차의 속도가 점점 줄더니 몇 걸음 더 나가지 못하고 차가 그 자리에 서버렸다. 골골거리던 엔진 소리마저 뚝 멎었다. 19년 된 고물 라다 승용차가 지옥길을 통과하느라고 가진 힘을 모두 소진해버린 것이다. A가 혀를 끌끌 차며 차 밖으로 나갔다. 바깥을 흘깃 보니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차창으로 드리워진 긴 소나무 가지의 형체만 보였다.
엘레오노라가 차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A는 니나에게 갔어요. 나오세요. 곧 올 거에요.”
나는 그녀 말대로 차 밖으로 나가서 심호흡을 했다. 니나가 누군가? 그걸 묻고 싶었으나 묻지 않았다. 하늘에 먹구름이 끼어있는데 그 구름 사이로 달이 움직이고 있었다. 구름이 엷어지면서 잠시 시야가 조금 밝아졌다. 큰 호수가 눈앞에 펼쳐졌다.
“저기 이층 집 보이세요?“
엘레오노라가 호수 건너편을 손으로 가리켰다. 건물의 희미한 형체가 바라다보였다. 어두워서 실제 거리보다 더 멀게 느껴졌다.
“A의 다차에요. 수세식 화장실도 있어요. A가 니나에게 맡겨둔 열쇠를 찾으러 갔어요.”
차가 멈췄는데 다차까지 갈 수가 있을까? 차를 버려두고 짐을 들고 걸어서 가나? 앞을 가로막고 있는 호수는 또 어떻게 건너지? 나는 호수를 우회하는 지름길이 있는 걸 몰랐다. 구름이 달을 가리자, 희미한 형체나마 보이던 건너편 다차 건물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
나는 자신이 찾아온 성 주변에서 끝없이 배회하는 어느 소설의 주인공을 떠올렸다. ‘역시 낙원에 이르는 건 쉽지 않구나.’
이십 분 쯤 지난 뒤 A가 돌아왔다. 니나네 마을이 근처에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우선 필요한 짐만 챙겨들고 니나네 집으로 가서 하룻밤 묵는 걸로 결론이 났다. 다차에는 내일 가기로 했다.
니나네 집은 차가 멎은 곳에서 아주 가까웠다. 짐을 들고 밭고랑 사이를 잠시 걸어가자, 통나무 울타리로 바람막이를 한 단층 목조주택이 나타났다. 경위야 어떻든 러시아 중남부 농가에서 뜻밖에 하룻밤을 묵게 된 건 행운이었다. 고물차 라다 덕분이었다.
좁은 마당 안으로 우리가 들어서자, 마당 한켠의 닭장에서 닭들이 웬 손님들이 찾아왔다고 자기네 끼리 쑤근거렸다. 집 주인 니나가 마루로 나와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반갑게 맞았다. 니나는 칠순에 이른 노인이지만 평생 땅을 일구며 살아온 농촌 여성답게 얼굴이 구릿빛으로 그을렸으며 내 손을 맞잡은 손에서도 사내 같은 힘이 느껴졌다. 그때 니나가 처음 보는 내 손을 맞잡으며 마치 오랜 친구를 맞아주듯 살갑게 웃어주던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니나네 집에 들어설 때 나는 이미 솔제니친의 소설 <마뜨료나네 집>을 떠올렸다. 그 무대가 아까강 근처 농촌인데 니나네 집이 있는 가브리노 마을 역시 근처에 아까 강이 흐르고 있다.
우리는 농가의 거실에 앉아 주인이 내온 빵조각과 우리가 가져온 음료수로 급한 대로 간단한 저녁을 먹었다. 니나는 남동생 발로자 부부와 셋이 함께 살았는데 발로자가 집을 나가버린 아내를 찾으러 인근 소도시로 나갔기 때문에 지금은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처음 보는 러시아 농가의 거실 풍경을 흥미롭게 둘러봤다. 거실 안쪽 벽에 성모의 사진 액자와 예수의 사진 액자가 나란히 걸려있고 그 아래 제단에는 십자가 목걸이와 예수와 성모의 인형상 등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다. 반대편 거실로 들어오는 입구에는 말로만 듣던 농가의 뻬치카가 버티고 있는데 장방형의 이 뻬치카는 일인용 침대만큼 덩치가 커서 그 위에서 사람이 잠을 잘 수도 있다고 A가 말해줬다.
밤이 깊었고 먼 길 오느라고 지쳤기 때문에 나는 발로자의 빈 침대-사실은 침대라기보다 벽에 붙여놓은 널빤지-에서 잠을 잤다.
잠을 자다가 누군가가 모포 한 장을 내 몸 위에 덮어주는 바람에 잠시 잠에서 깨어났는데 아침에 내가 그 얘길 꺼내자, 니나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수집은 웃음을 웃으며 자기가 한 짓이라고 고백했다. 니나는 새벽 같이 일어나 손님들의 아침 준비를 했다.
식탁에는 검은 빵은 물론, 우유와 삶은 계란, 야채 샐러드가 나왔는데 이때 맛본 삶은 계란의 구수한 맛은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았다. 그 맛이란 내가 어릴 때 고향에서 맛보던 그 계란 맛이었다. 수천마리 닭들을 닭장에 가둬놓고 집단 사육하는 양계장에서 나오는 계란에는 그런 맛이 없다. 내가 삶은 계란을 맛있게 먹는 걸 곁에서 지켜보던 니나가 주방으로 가더니 삶은 계란 몇 알을 더 가져왔다. 니나는 마치 정 깊은 누나처럼 흐뭇한 표정으로 A와 내가 맛있게 식사하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봤다.
“니나 남편이 전쟁에서 폭탄 파편을 맞고 거길 다쳐 아이를 못 낳았지. 남편은 일찍 죽었어.”
식사 뒤 잠깐 문 밖 배추밭 언저리를 산책할 때 A가 들려준 말이다. ‘거기’란 생식과 관련된 남자의 신체 기관일 것이다.
A와 니나는 마치 오랜 소꿉친구처럼 스스럼없이 웃고 떠들었다. 두 사람이 즐겁게 얘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A의 신부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엘레오노라가 질투할까봐 마음이 쓰일 정도였다.
니나네 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우리는 아침 일찍 차를 놓아두고 걸어서 A의 다차로 갔다. 가브리노는 과연 듣던 대로 풍광이 좋은 마을이었다. 다차가 넓은 호수를 내려다보는 자리에 있어서 다차의 앞뜰에서 보면 마치 넓은 호수가 정원 안에 있는 것 같다. 호수 건너편으로는 니나네 마을이 아련히 바라다 보인다.
A의 다차는 그다지 호화 건물은 아니지만 아방가르드 작가답게 적어도 외관만은 주변의 다른 다차들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개성을 드러내는 건물이었다. 나는 아래층에 배정받은 방에 짐을 풀어놓고 먼저 앞뜰로 나가서 그곳에 있는 나무 벤치에 앉았다. 마침 햇빛이 밝게 일대를 비추고 있고 사방은 고요했다. 그곳에서 방금 떠나온 니나네 마을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온갖 시름이 다 사라지고 모처럼, 정말 오랜만에 평온한 마음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런 기분을 맛보려고 낙원을 찾아 헤맬 것이다.
내가 앉아있는 벤치의 바로 옆 자리에 딱 한 그루의 그 민들레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무릎 높이까지 자란 그 민들레가 키가 너무 커서 처음에는 어떤 종류의 식물인지도 몰랐다. 키도 그렇지만 이파리와 꽃수술이 한국에서 보던 보통 흔한 민들레와는 너무 달랐다. A가 이름과 함께 사람이 먹을 경우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독성을 가졌다는 걸 알려줬다. 나는 틈만 나면 앞뜰의 벤치로 나가서 시간을 보냈고 그때마다 파클론 아드반치쿠를 만나고 이 민들레와 대화를 나눴다.
‘다른 민들레는 보통 무리지어 서식하는데 너는 왜 혼자 여기 서있나?’
내가 물으면 민들레는 내게 되묻는다.
‘당신도 여기 혼자 있지 않나요?’
‘그렇군. 그런데 넌 어디서 여기까지 흘러온 거지? 고향이 어디야?’
‘고향 같은 건 없어. 여기저기 흘러다니다가 혼자 씨앗으로 여기 떨어진 거지.’
‘하긴 나도 너랑 비슷해. 몇 달 전까지 상상도 못하던 곳에 지금 와서 있는 거야.’
집 밖에 나오면 나는 언제나 이 민들레를 먼저 찾아봤다. 버섯을 따러 A와 숲으로 들어갈 때나 약숫물을 길러 약수터로 나갈 때도 파클론 아드반치쿠가 잘 있나 반드시 눈여겨보곤 했다. 열흘 가량 그곳에서 머물고 모스크바로 돌아가려고 다차를 떠날 때 나는 그 한 그루의 민들레와 작별하는 게 무척 아쉬웠다.
“잘 있어. 파클론 아드반치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