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레델키노 마을은 러시아 작가촌이다. 언제부터 조성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빠스테르나크가 말년을 여기서 지낸 걸 보면 사회주의 초창기부터 작가촌이 있었지 않나 생각된다. 이곳은 러시아 작가동맹에서 관리하는데 이곳 주택을 배정받으려면 일정한 작가 이력과 작품성을 인정받아야 하는 걸로 알고 있다. A는 이미 충분한 입주 자격을 갖추었지만 그곳에 관심을 두지 않고 지내다가 몇 해 전 입주신청을 하고 일 년쯤 전에 겨우 주택을 배정받았다.

 

A의 집 앞에 도착해서 이진이 A와 통화를 했고 곧 A가 나와서 차가 진입할 수 있도록 대문을 열어주었다. 허름한 외투를 걸친 A는 수염도 깍지 않고 안색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는 차에서 내리는 나를 가볍게 두 팔로 안으며 빙긋이 웃는 걸로 반가움을 표시했다. 서울에서 작별한 뒤 3년만인가? 우리는 요란한 인사치레 말은 하지 않았다. 

 

이곳 주택은 아주 특이하고 재미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이층인데 네 가구가 각기 독립 출입문을 갖고 있는데 단층에 있는 A의 집 앞에서는 다른 세 가구의 출입문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기분 상으로는 한 건물에 여러 가구가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며 실내에서도 다른 가구에서 전해오는 소음 같은 것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집 내부 구조도 별로 넓지 않은 공간을 아주 쓸모 있게 잘 구획을 지어 배치해 놓았다. 침실은 두 칸, 거실과 주방과 화장실이 있는데 소가족이 살기에 적당한 구조였다.

 

A는 나를 데려온 이진과 차오에게 아주 친절하게 굴었다. 두 사람에게 자기 책을 가져와서 사인을 해서 한권씩 선물했다. 함께 사진도 몇 장 찍었다. 일정이 바쁜 이진과 차오는 반시간쯤 거기 머물다가 차를 타고 시내로 돌아갔고 넓지 않은 거실에는 주인인 A와 손님인 나, 둘만 남았다.

 

“엘레오노라 지금 병실에 있소. 그래서 선생 접대를 못하오. 팔이 몹시 아파 내일 수술할 거요. 내일 엘레오노라 수술 때문에 내일 거기 못가요.”

 

A가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거기'란 니나가 있는 가브리노를 말하는 것이다.

 

그럼 언제 가브리노에 갈 수 있느냐? 묻고 싶지만 나는 잠자코 있었다. 지금은 그의 결정에 따르는 수밖에 없다.

 

“가브리노, 모래 갑시다. 나도 허리를 다쳐 운전하기 어렵소. 병원에 가봐야 하오.”

 

“어떻게 다쳤지요?”

 

“며칠 전 욕실에서 넘어졌소.”

 

A는 얼굴을 찡그리며 한 손으로 허리 뒤를 몇 번 주물렀다.

 

“A선생, 무리하실 것 없어요. 내가 꼭 거기에 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니나는 고맙게 생각할 겁니다. 가브리노 가는 걸 서두르지 마시고 치료나 잘하세요.”

 

나는 진심으로 A에게 말했다. 살아있는 사람의 건강이 우선 중요하다. 그러나 A는 이 말이 내 진심이라고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거기 갈 거요. 내일 수술 끝나고.”

 

A는 탁자 위에 있는 물병을 들고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말했다.

 

“니나 만나는 것 중요해요. 나도 정신의 가치가 뭣보다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소. 그걸 아니까 내가 운전하고 같이 갈려고 하는 거요.”

 

작가니까 체면치레로 그냥 하는 말이 아닐까? 나도 A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A의 이 말에서 도리어 A가 나의 가브리노 행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브리노는 모스크바에서 가까운 곳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 하루 종일 차를 몰고 가야 한다. 날씨도 춥고 자기 몸도 불편한데 나를 차에 태우고 그곳으로 나를 안내한다는 일이 A에게 엄청난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다.

 

나의 가브리노 방문에 대한 A의 생각이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걸 읽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진> 파클론 아드반치쿠 - 러시아의 민들레. 독성이 강해 정신착란을 일으킨다고 한다. 다차 뒷뜰에 서식

 

 

 -니나는 본래 나의 오랜 친구이고 당신이 니나를 만난 것은 그때 며칠 사이 두세 차례 뿐인데 니나가 당신에게 그렇게 소중한 존재라는 게 맞아? 언제부터였지? 나 아니면 당신은 니나란 존재조차 몰랐던 것 아냐.

 

A가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나는 그 표정에서 읽었다. 그러나 노련한 원로작가는 자기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말했다.

 

“니나가 선생을 참 좋아했던 건 기억이 나오. 아주 좋게 보았던 거지. 본래 마음이 큰 사람이지만 그때만큼 처음 본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걸 본 일이 없소. 좋은 땅을 거저 주겠으니 이곳이 맘에 들면 여기 집 짓고 와서 살라고 했지. 기억나오?”

 

“물론 기억하지요. 그 땅들, 돈 많은 도시 사람들이 욕심낸다던 그 땅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나요?”

 

“니나 죽고 나자, 동생 발로자가 술 마시느라고 죄다 팔아치워 버렸어. 집도 팔아치우고. 남은 게 하나도 없어.”

 

“발로자는 거기 있나요?”

 

“아직 마을에 있는데 오두막 같은 데 거처하오. 보기가 딱할 정도로 망했어.”

 

바깥이 점점 어두워졌다. A는 엘레오노라 대신 자기가 저녁을 마련해야 한다며 주방으로 건너갔다. 그 사이 나는 흡연을 위해 좁은 현관을 지나 바깥으로 나왔다. 입구의 계단에 서있는데 바로 지척에 있는 큰 소나무 쪽에서 까악까악 새 울음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크기로 볼 때 굉장히 몸집이 큰 새가 분명했다.

 

새는 나무기둥에 붙어서 소나무 껍질을 쉬지 않고 쪼아대고 있다. 드디어 나무기둥에서 분리된 큰 나무껍질이 땅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딱따구리일까? 까마귀일까? 러시아 숲에는 까마귀들이 서식하고 있는 모습을 가끔 보았다. 그러나 숲의 가지들에 가려 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피우던 담뱃불을 끄기 위해 땅으로 내려왔다. A는 벌써 두 차례나 불조심을 내게 강조했다. 숲속에서는 더욱 화재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정도는 나도 알았다.

 

나는 손에 든 담배를 땅바닥에 버리고 무심코 그걸 밟아 끄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담배가 버려진 곳 주변에서 쉬지 않고 움직이는 생명체가 눈에 띠었다. 수많은 생명체였다. 작은 개미떼들이 모래성을 쌓느라고 행렬을 지어 저녁이 다가오는 이 시간에도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하마터면 나는 담뱃불을 끄려다가 나와 아무런 인연이 없는 그 러시아의 작은 개미떼들을 지옥으로 보낼 뻔했다. 7년만에 어렵게 찾아온 러시아 땅에서 비록 하치않은 개미의 생명이지만 나의 러시아 여행이 이들에게 끔찍한 불행으로 연결되는 우연의 도미노를 나는 결코 원하지 않았다.

 

A는 그 연배의 남자치고 요리솜씨가 좋은 편이었다. 식탁에는 밥과 국, 술 안주로 샐러드와 러시아 소시지 등이 차려져 있고 어디서 선물 받았다는 붉은 색 과일주도 한 병 놓여 있었다. 우리는 오랜만의 해후를 자축하며 건배를 했다. 술은 보드카보다 더 독해서 몇 잔 마시자, 금방 취기가 올라왔다. 두 사람 모두 애주가는 아니어서 술병을 서둘러 닫았다. 

 

기분이 고조된 순간에 A와 마주 앉아 있을 때는 언어의 벽이 둘 사이를 더욱 완강하게 가로막고 있는 것을 느낀다. 7년 전 A를 처음 만났을 때 보다 이번에는 단절감이 더 심했다. 나는 러시아 말에 먹통이고-러시아를 여행할 때마다 이점이 늘 너무나 아쉬웠다-고려인 2세인 A는 한국말에 유아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이야기가 조금만 미묘하게 발전해도 거기서 막혀버린다. 7년 전 A를 따라 가브리노에 갔을 때는 그런 점이 더 편하게 느껴졌다. 자잘한 데 신경 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친분이 쌓여진 지금은 대화가 막힐 때마다 짜증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