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에서 7년 전 내가 A를 처음 만나던 시간으로 되돌아가보자.
나는 3개월의 체재를 계획하고 러시아로 떠났다. 남들에겐 이런저런 러시아 일정을 부풀려 말했지만 실제는 일종의 도피 여행이었다,
서른 살 무렵에 잠시 몸 담았던 교직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로 나섰을 때 초기에 생활 자체가 어려웠고 전망도 뚜렷하지 않았다. 갑자기 벽에 부닥친 것이다. 나는 괴로운 청소년기를 보냈던 남쪽 고향 바닷가로 며칠 여행을 떠났다. 도피 여행이었다. 그 이후에도 어떤 딜레머와 마주칠 때마다 고향의 그 바닷가를 찾았다. 작가 생활의 이력도 쌓일 만큼 쌓이고 장년기를 훌쩍 지난 지금 그 방향이 고향의 바닷가에서 러시아로 바뀐 것뿐이다.
그 무렵에 좋지 않은 일 몇 가지가 내 신변에 일어났다. 현실에 환멸을 느끼거나 실망감을 느끼는 건 흔히 있는 일이다. 누군가가 공개지면에 나에 관한 모함성 글을 게재했는데 흔치 않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 지면은 내가 수년 전 연재 작품을 쓰던 지면이고 그 글 게재자는 소싯적부터 나와 가장 가깝다고 알려진 동료 작가였다. 작가에게는 이름 몇 자, 그게 자산의 전부이다. 분노로 입술이 부르텄지만 마땅한 대응책도 없었다. 이것이 도피를 충동한 직접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로 가자. 몇 차례 다녀온 인연으로 그나마 조금 낯이 익은 땅이다. 러시아문학 전공자인 K 교수가 이때 고려인 작가인 A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A는 당시 카자흐스탄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가 모스크바로 돌아오면 나를 데리고 자기 다차가 있는 가브리노로 가는 걸로 일정이 짜여졌다. 대학 후배이기도 한 K 교수가 애써준 결과였다.
툴스카야의 허름한 소형 아파트에 자리를 잡고 나는 무료한 나날을 보내며 A가 카자흐스탄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A는 예정된 날자가 지나도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A는 어떤 사람일까? 그가 과연 일면식도 없는 나를 맞기 위해 나를 찾아줄까?
K 교수의 다짐에도 불구하고 나는 의구심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때까지 A에 관해 내가 아는 거라곤 오래 전 국내 문학지에 개제된 그의 자전 성격의 글을 몇 페이지 읽은 것뿐이다. 거기에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나온다.
-아직 작가로 입신하기 전, 청년기에 A는 모스크바 아파트 공사장에서 인부로 일한다. 처음 잡부로 일하다가 뒤에 타워크레인 기사가 되었는데 저녁이 되면 인부들이 모두 퇴근하고 사방이 고요할 때, A는 공중의 크레인 조종석에 홀로 앉아 거기서 바라보이는 모스크바 중산층 아파트의 내실 생활을 몰래 훔쳐보는 취미에 빠졌다. 고독한 이방인 청년인 그는 여인이 옷을 갈아입는 은밀한 장면을 자주 훔쳐보곤 했는데 그는 젊은 날의 이런 자기 행위에 대해 도덕적 자괴감을 느낀다고 자전에 쓰고 있다.-
이 장면을 읽고 나는 A라는 인물에 흥미를 느꼈다. 그는 사방이 어두워진 때 타워크레인의 조종석에 홀로 앉아 중산층 생활을 훔쳐보며 신분 상승의 열망을 끊임없이 키웠을 것이다. A에 대한 관심은 그러나 그 때뿐으로 그 이후 그를 까맣게 잊고 지냈다.
K 교수 말에 의하면 A는 고려인이지만 그의 러시아어 문체는 매우 정교하며 특히 러시아 중부 농촌지역 토속어 구사에도 능하다고 한다. 이런 미덕 때문에 그가 러시아 문단의 인정을 받았을 것이다. 러시아에는 톨스토이, 체홉 등 전통적 리얼리즘 소설이 주류로 되어있긴 하나 독자적 실험을 추구하는 전위(아방가르드) 계열의 작가들도 적지 않다.
어수선한 정치적 변환기이던 20세기 초에도 공상과 현실이 뒤섞인 환상적 작풍을 구사했던 에프게니 자먀찐(1884-1937) 같은 작가가 상당한 활동을 벌인 걸 보면 역시 이 나라의 문학적 잠재력이 큰 것을 알 수 있다. A도 전위작가 계열의 작품을 주로 써낸 걸로 알고 있다. 나는 A를 알게 된 이후 최근에 우리말로 번역된 그의 단편 두 편을 겨우 읽었을 뿐이다. 한편은 실험적 수법의 소설이고 한편은 평이한 스토리 소설인데 번역상 전달의 난점도 있겠지만 그다지 큰 인상은 받지 못했다.
툴스카야에서 동네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며 거의 한 달 가까이 지났을 때 드디어 A가 카자흐스탄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왔다는 연락이 왔다. 그리고 이틀 뒤 A가 차를 가지고 내가 머물고 있는 툴스카야의 아파트 앞에 나타났다. A를 안내한 사람은 K 교수 제자인 현지 유학생으로 그는 그동안 A와 나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었다. 연락을 받고 나는 부랴부랴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가브리노 다차에서 열흘 정도 보낼 거라면 거기 따른 준비물을 챙겨 넣어야 한다. 양말, 내의, 칫솔과 치약, 그리고 무엇보다 환전해둔 루블화, 읽을 만한 책 한두 권, 한 사람이 움직이는 데 참으로 여러 종류의 물건들이 뒤를 따른다.
“다차가 있는 랴잔의 가브리노는 경관이 뛰어납니다. 모스크바에서 십 년 거주한 사람도 지방의 그런 경관을 구경할 기회가 없어요. 선생님은 운이 좋으십니다.”
K 교수 제자가 내게 했던 말이다. 그는 한마디 더 보탰다.
“여기 한국 대사님도 초대받아 가브리노를 다녀오셨는데 A 선생과 함께 버섯도 따고 굉장히 좋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A는 아무나 거기 데려가지 않는다. 당신은 선택받은 것이다.’ 이런 뜻을 그 말은 은근히 암시했다. 물론 A는 내가 아니라 K 교수 체면을 봐서 나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나는 이것저것 챙겨 넣어 꽤 무거워진 가방을 끌고 4층에서 아래로 내려갔다. 일층의 구둣가게 앞에 지프 차 형태를 닮은 아주 낡은 ‘라다’ 한 대가 정차해 있었다. 라다는 오랜 기간 러시아의 보급형 국민차로 그 이름에는 ‘행운의 여신’이란 뜻이 있다.
몸집이 좋은 유학생이 달려와서 내 가방을 받아 차의 트렁크에 실었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그가 천천히 운전석에서 나와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키가 좀 작은 편이나 몸집은 단단했고 코밑에는 수염을 기른, 나와 거의 비슷한 또래의 남자였다. 그 얼굴은 전에 사진에서 본 적이 있는데 아주 야무지고 고집이 세 보이는 인상을 풍겼다.
그는 웃지도 않고 한마디 말도 없이 내 앞에 와서 손을 내밀었다. 그는 드물게도 초면인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린 채 나와 악수를 했다. 이런 경우 보통 거만하다는 말을 듣는다. 그는 분명히 조금 거만한 태도를 취했다. 고려인 신분으로 대러시아의 일급작가가 된 자부심을 그가 한순간도 잊지 않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A와 나는 함께 차에 올랐고 밖에서 제자가 손을 흔들었다. 차는 곧 구두 가게 앞에서 떠났다.
나는 뒷날 이 순간을 떠올리면서 ‘두 사람의 벙어리가 낙원을 향해 출발했다.’는 타이틀을 생각해냈다. A는 한국말은 겨우 유아 수준을 벗어난 상태이고 나는 러시아 말에 완전 먹통이다. 손짓 발짓, 거기에 약간의 초보적 한국말을 보조로 사용하면 그럭저럭 공동생활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명색이 작가인 두 사람이 만나서 열흘 동안이나 기초생활 유지에 머문다면 이 만남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처음 K 교수는 박사과정인 자기 제자를 통역으로 동행시킨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제자는 논문 마감이 임박해서 시간을 낼 수 없다고 말했다. 예비박사님은 도리어 내게 반문했다.
“두 분 사이에 꼭 대화가 필요할까요? 아마 걱정 안하셔도 될 거라고 저는 생각하는데요.”
차를 타고 가는 동안 거의 한 시간이 지났으나 당연히 둘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다지 걱정하지는 않았다. 아마 상대에 대한 일정한 신뢰감이 내게 있었던 것 같다. 아파트 공사장의 타워크레인 조종석에 앉아 모스크바 중산층의 내밀한 생활을 훔쳐보던 청년을 나는 기억했다. A를 처음 본 순간 그 장면을 떠올린 것이다. 그 자전을 보면 자기 성찰의 솔직하고 진지한 고백들과 자주 마주친다. 그런 기억들이 처음 만난 A와 나 사이의 거리감을 지워버린 것이다.
두 시간쯤 차가 달린 뒤에 차는 어느 한적한 교외 주택가로 진입했다. 비교적 잘 지어진 큰 규모의 주택들이 모여있는 부촌이었다. 어느 2층 저택 대문 앞에 차를 세우고 우리는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이 집은 건축업으로 재산을 모은 A의 새 처남의 주택인데 이곳에서 A의 새 아내가 된 엘레오노라가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엘레오노라는 오십대? 실제는 그보다 젊어 보이는 여성인데 본래 우즈벡에서 성장했고 근래에는 카자흐스탄에서 생활해온 인텔리 여성이다. 점심을 먹기 위해 식탁에 앉았을 때 엘레오노라가 처음 얼굴을 내밀고 나에게 인사를 했다. 역시 고려인 출신인 엘레오노라는 남편보다 약간 높은 수준의 한국말을 구사했다.
A의 새 아내를 만난 뒤에 나는 비로소 A가 왜 카자흐스탄에서 그렇게 오래 머물 수밖에 없었는가를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러시아 여행을 계획하던 초기만 해도 그의 아내는 젊은 러시아 여성이었다. 그 사이에 그는 러시아 여성과 이혼하고 카자흐스탄으로 가서 고려인 출신의 엘레오노라를 만난 것이다.
이혼과 재혼, A의 경우는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결혼이 된다. 내가 만난 러시아 작가들은 대체로 두 번 세 번 결혼의 전력자들이었다. 러시아 사람들은 이혼을 우리만큼 큰 사건으로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작가나 예술가들 경우는 더 그런 경향이 강하다. 처음에는 약간 당황스러웠으나 곰곰 생각해보니 이혼을 죽음처럼 생각하는 우리 풍속보다는 도리어 그쪽이 더 합리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A의 처남 집에서 잠시 휴식을 가진 우리가 다시 출발할 때는 일행은 세 사람이 되었다. 엘레오노라가 동행하게 된 것이다. 이번에는 엘레오노라가 조수석에 앉고 나는 뒷자리로 물러났다. 가브리노는 모스크바에서 결코 가까운 곳이 아니었다. 중간에 조금씩 휴식을 취하고 가다 보면 어느덧 밤이 되어버린다. 다차는 국도에서 벗어나 숲의 사잇길을 한참 달린 뒤에 겨우 나타났다. 그런데 차가 국도를 벗어날 즈음에는 이미 주위가 어두운 밤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다차로 가는 숲 속 사잇길은 마치 풍랑을 일으킨 물결처럼 노면의 굴곡상태가 극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