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당시 발표 전문으로 처음 공개하는 셈이다.

 

 

<나의 톨스토이>

 

이번에 나는 두 번째 이곳에 왔다. 꼭 십년 전인 1995년 이맘때쯤 나는 모스크바에 왔던 길에 스승에게 첫인사를 드리기 위해 이곳에 찾아왔었다. 오는 길에 스승의 유택에 꽃을 바치기 위해 투라에서 장미 한 송이를 샀는데 꽃값이 아주 비싸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내가 톨스토이를 스승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대개 의아스런 눈길로 나를 쳐다본다. 그래서 이런 말을 나는 쉽게 하지 않으며 아주 은밀한 장소에서 가끔 이 말을 한다. 이제 내가 그를 감히 스승으로 부르는 이유를 간략하게 말하겠다.

 

대학 일학년 때 나는 거리를 지나다가 우연히 노점에서 싸구려 책 한 권을 샀다. 책값이 일 달라도 되지 않는 이 책은 출처도 분명하지 않았고 종이 질이나 활자도 엉망이었다. 그 때문인지 지금 그 책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참회록>이나 <인생독본>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결국 이 책은 내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나는 강의실 뒤 구석에 앉아 이 책을 읽으며 너무나 많은 눈물을 흘렸다. 손수건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다가 그것으로 안 되어 소매 끝으로 눈물을 닦아내고 또 옆 친구의 손수건을 빌려 눈물을 닦아냈다. 지금까지 그렇게 한꺼번에 많은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다. 왜 나는 그때 그토록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거의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그 일이 생생히 기억된다. 나는 그때 글쓰기와 손을 잡는 언약의 의식을 치르고 있었던 것 같다.

 

전쟁, 가난, 폭력으로 죽어간 형제 등 이십 세 청년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스런 기억에 허덕이던 나를 그 글은 구해주었다. 깊은 상처를 어루만지고 인간의 위엄과 고결한 정신을 어떻게 지켜내야 하는가를 그 글이 내게 가르쳐주었다.

 

그 글은 마치 활자 하나하나가 강철로 만든 화살촉이 되어 내 심장에 박히는 것처럼 내게 충격과 감동을 안겨줬다. 기독교에서 성령을 받았다고 하듯 나도 그때 고결한 정신을 담은 글의 힘이 주는 성령을 받은 셈이다. 몇 달 동안 길을 걸을 때나 다른 사람과 얘기를 나눌 때도 오직 나는 그 글의 성령에 넋을 빼앗겨 그 글만을 되뇌었다. 그의 몇 줄의 글은 마치 뇌성처럼 내 청각을 울렸다.

 

삶에 대해 진지하고 또 진지한 성찰을 가능케 하는 이 글의 힘이란 어디서 오는가? 그때 이전에 나는 글을 쓴다는 건 다만 재능으로 흥미로운 얘기를 전개하거나 자기 경험담을 멋지게 펼쳐놓는 일로만 생각했지, 그것이 삶의 자세를 성찰하고 의미를 규명하는 아주 심각한 작업이 될 수도 있다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것을 그 책은 내게 명백하게 일깨워준 것이다.

 

당시 아직 경제개발이 시작되기 이전의 한국에서 글쓰기에 투신하는 것은 밥을 굶는 것을 의미했다. 그때 내 희망은 외국어를 잘 공부해서 장차 경제개발 시기에 유능한 활동가가 되는 것이었고 가족들의 기대감도 컸었다. 나는 자신이나 가족의 이 기대감을 저버렸다.

 

-그렇다. 만약 이런 글을 몇 줄이라도 쓸 수만 있다면 한번 생을 걸어보는 것도 좋다- 한번 세례를 받은 나는 ‘굶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행히도 지금까지 굶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사실 그의 많은 소설작품들 가운데 내가 읽은 것은 몇 편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로부터 소설 기법이나 스타일을 배운 것이 아니고 백지 위에 글을 쓰는 행위의 엄숙한 의미와 가치를 배운 것이다.

 

처음에는 소설을 쓰지 않고 그 글과 유사한, 산문을 흉내 내다가 결국 특정한 장르가 필요해서 소설쓰기로 글의 형식을 바꿨다. 그는 분명히 나를 글 쓰는 사람으로 이끈 단 한 사람의 스승이다. 마치 마술사가 최면을 걸어 비록 잠시지만 한 사람의 사고를 바꾸어놓듯이 그는 높은 덕성, 강렬한 호소력으로 나를 이쪽으로 잡아 끌어준 것이다.

 

나는 오랜 전 무슨 이유로 잠시 감옥 생활을 경험한 일이 있는데 그때 옆에는 사형수나 이른바 흉악범도 있었다. 나는 그들과 가깝게 지내려고 애썼고 결국 그렇게 되었다. 이런 일은 작가의 본질적 기능은 아니지만 상대가 사기꾼이건 악인이건 그와 벗이 되겠다는 욕구와 충동이 내게 있다. 사람들이 모두 겁내는 그들에게 내가 자연스럽게 다가간 것을 보면 이런 충동을 지식인의 가벼운 허영이라고 볼 수는 없으며 나의 이런 기질은 톨스토이가 내게 가르쳐준 것이다. 그 죄수들 얘기를 실제로 몇 편 쓰기도 했다. 

 

최근에 나는 오래 전 살해된 형과 살해자의 얘기를 쓰기 위해 가해자가 태어나고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마을을 몇 차례 찾은 일이 있다. 그도 오래 전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그의 행적을 뒤지고 그 사람 옆으로 다가갈수록 그의 체온이 느껴지고 호흡소리까지 들렸다. 나는 살해자 이전의 인간으로 그의 혼을 껴안아야 하는가, 이 문제로 갈등을 겪었고 지금도 이 갈등은 진행 중이다.

 

톨스토이라면 이런 경우 어떻게 대응할까? 그것을 상정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나는 역시 쉽게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끊임없이 그가 간섭하고 내 행동에 제약을 가하는 것을 느낀다. 때로는 불편하고 귀찮고 고통스럽기도 하다.

 

이번 경우는 좀 특수 상황이긴 하지만 작가에겐 이것과 비슷한 상황이 드물지 않게 생긴다. 물론 작품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개인적 감정을 억제해야 하는 것이지만 증오의 대상인 인물의 영혼을 껴안는다는 것은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기독교도도 불교도도 아닌 보통 인간인 내가 그에 대한 증오와 연민이 교차하는 갈등에 시달린다는 것은 내 안에 톨스토이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이 가장 고결한 인간정신의 길이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위대한 스승에게 이런 자리에서 경의를 표할 수 있게 해준 데 대해 감사한다.

 

2005. 9

 

 

B 교수가 글을 낭독하는 동안 청중석이 뜻밖에도 아주 조용했다. 평소에는 연사가 나와서 열변을 토해도 한쪽에서는 사담을 나누는 웅성거림이 으레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교수 옆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나는 이런저런 복잡한 상념에 얽혀 있느라고 분위기가 그렇게 조용하고 차분했다는 것도 낭독이 끝난 뒤에 알았다. 드디어 낭독이 끝났는데 어떤 여성 참가자가 사회를 보던 집사장에게 자기가 방금 뭔가 질문을 했는데 왜 대답이 없느냐고 투덜거렸다. 그러자, 콧수염에 풍채가 좋은 집사장이 여성에게 말했다.

 

“내가 지금 낭독에 정신이 팔려 당신 질문을 미처 못 들었소.”

 

그 집사장은 다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는 까레이가 왜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는지 그 이유를 이제 알았소.”

 

까레이를 선진국으로 비유한 것은 좀 과장된 느낌이 들었으나 집사장이 낭독 내용에 대해 아주 후한 평가를 내린 것은 분명했다. 집사장은 세션은 물론 모든 행사를 주관했으며 재단 내에서 실질적 권한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뒤에 A가 내게 다가와 내 글이 재단 공식 자료로 등재되었다고 알려줬다. 러시아 작가들의 반응은 겁을 집어먹던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어떤 원로 작가는 내게 다가와 나를 가볍게 포옹하고 한 손으로 자기 가슴과 내 가슴을 잇달아 짚어보이며

 

“당신 가슴에도 톨스토이, 내 가슴에도 톨스토이, 그러니까 우리는 같은 스승을 둔 친구요.”라고 말했다. 참가자 가운데 제일 젊어 보이는 작가가 내게 다가와 의자에 앉아있던 내 앞에서 한쪽 무릎을 꺾고 앉더니 자기 작품이 게재된 잡지에 사인을 해서 내게 선물한 뒤 물었다.

 

“모스크바 서점에 가면 당신 작품을 볼 수가 있나요?”

 

이런 때는 정말 곤혹스러웠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지금이라면 러시아어로 된 단편 한편 정도는 알려줄 수가 있다. 박노자 교수가 이태 전 페테르부르그의 문학지 <네바>에 한.러 수교 이십주년 기념 한국작품 특집란에 번역 소개한 단편이다. 그나마 내가 선택한 게 아니고 박노자가 자기 취향대로 '군대 감방' 소재 작품을 고른 것이다).

 

이 신예작가에게 그가 기대한 답변을 주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안톤이란 이름의 이 신예작가는 지금 한창 촉망받는 신예라고 누군가가 곁에서 일러줬다. 조촐한 낭독 글에 대한 호평은 이어졌다. 중년 여성 시인이 내게 일부러 다가와 한마디 던지고 지나갔다.

 

“당신이 이 세션에서 가장 멋진 내용을 가장 멋진 형식으로 발표했어요.”

 

B 교수가 방금 그 말을 한 여성이 작가동맹의 사무총장이라고 알려줬다. 북경에서 온 중국인 러시아문학 연구자도 내게 다가와 동양의 이웃으로서 친밀감을 표시했다. 그밖에도 내게 다가와 손을 내민 사람이 몇 사람 더 있었다.

 

그 시간 이후 나는 무명에서 지명인사가 되었다. 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사람들이 오다가다 마주치면 웃으며 아는 체했고 식사 시간에 잔을 권하는 손들도 늘어났다. 

 

“아, 나는 아무래도 러시아 체질인가? 이 사람들과 코드가 맞는 것 같지 않나요?”

 

잠시 우쭐해서 B 교수에게 이런 농담까지 했다. 러시아 작가들은 이방인이 거만하다고 여길 정도로 자부심들이 대단하다. 그들이 문학에 관해서는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 대신 자기 감정이나 생각을 솔직하게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그것도 자신감에서 나오는 행동일 것이다.

 

기분전환이 된 나는 그 행사가 끝날 때까지 거기 묵고 싶었다. 그런데 B교수 귀국 일정이 당겨져서 그와 나는 행사 종료를 며칠 앞두고 먼저 야스나야 팔리아나에서 나와야 했다. 내가 작가들이 모인 자리로 가서 먼저 떠나게 되었다는 하직인사를 했을 때 어떤 작가가 내게 말했다.

 

 “당신이 가버리면 여기가 재미없어질 텐데.”

 

물론 짓궂은 농담이지만 그런 농담조차 싫지는 않았다. 나는 작가들 한 사람 한 사람과 악수를 나눈 뒤 맨 마지막으로 스승에게 하직인사를 하기 위해 어디서 꽃 한 송이를 구해 들고 가까운 스승의 유택으로 갔다. 건물들이 모여있는 데서 아주 가까운 자시에카 숲 속에 그의 유택이 있는데 그것은 사연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마치 아기무덤이나 작은 동물의 무덤으로 볼 정도로 평지에 볼록 솟아있는 작은 규모의 무덤이었다. 이 무덤 곁에 있는 나무에는 다음 글이 새겨진 팻말이 걸려 있다.

 

-내 무덤을 만들기 위해 인부들(농노들)에게 어떤 사역도 시키지 말라-

 

물론 이건 이곳에 묻힌 사람이 남긴 유언이다. 그 팻말은 여전히 거기 걸려 있었다.

 

언제 다시 이곳에 오게 될까? 나는 그의 유택 앞에서 잠시 생각에 잠긴 뒤 뒤에서 재촉하는 B 교수와 함께 버스가 대기하는 영지 입구로 나왔다.

 

모스크바로 가는 귀로는 이번에는 철도를 이용하기로 했다. 재단에서 내어준 버스는 영지에서 가까운 간이역까지만 우리를 데려다주었다. 간이역은 영지에서 차로 이십분 정도 걸리는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이 역은 러시아 정부에서 톨스토이 영지를 위해 새로 만들어준 역이라는 말을 들었다. 역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데 그렇다면 이 역은 톨스토이가 만년에 부인 소피아 안드레예브나를 피해서 지향점이 모호한 방랑의 길을 떠날 때 출발 지점이던 야센키 역은 아닌 것이다. 아마 야센키 역도 이 신설된 간이역 부근에 있을 것이다.

 

간이역은 외부와 따로 경계선을 그어놓지도 않은, 열린 공간에 사무실로 보이는 작은 벽돌 건물 하나만 세워진 초라한 모습이었다. 철도직원 복장을 한 사람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평소에는 관리를 하지 않고 영지에서 필요할 때만 열차를 보내주는 그런 사설 역(?) 정도로 보였다.

 

9월이면 러시아는 벌써 겨울 찬 공기가 느껴지는데 이 날 따라 날씨는 따뜻하고 쾌청했다. 버스를 타고 온 일행들이 삼삼오오 짝지어 둘러서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사이 나는 플랫폼에 마련된 나무 벤치에 혼자 앉아 오랜만에 담배를 꺼내 피웠다. 영지에서는 숲이 많아서 불조심 하느라고 참여자들이 스스로 끽연을 자제했던 것 같다.

 

“당신은 감옥생활을 했다는데 죄목이 무엇이었소?”

 

영지에서 간이역으로 오는 도중 버스 바로 뒷좌석에 앉아있던 러시아 작가, 사십대, 많아도 쉰 살 이전으로 보이는 작가가 불쑥 내게 물었다. 내가 뭐라 하기 전에 옆에 있던 B 교수가 간명하게 대답했다.

 

“군대에서 군법을 어겨 잠시 군의 감옥 생활을 한 겁니다.”

 

그러자, 질문을 했던 작가가 조금 실망한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 사람은 내가 대단한 정치범이나 사상범으로 오랜 기간 감옥생활을 했다는 답변을 기대한 것 같다. 사회주의 때나 제정시대 때나 러시아에는 유독 그런 인물들이 많다. 그 사십대 작가의 얄궂은 질문은 잠시 내 수치심을 유발했다. 언제 어디서나 나는 그 문제가 화제에 등장하는 걸 애써 피해왔다.

 

도망병? 도망 장교? 엄밀히 말하면 도망 장교후보생이다. 한국에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도망병은 아주 저급의 파렴치범으로 취급한다. 나는 장교후보로 입대한 뒤 훈련과정에서 무단이탈하여 다시 그곳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7년 만에 체포되어 특수군대인 그곳 사령부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 7년은 내 삶의 가장 어두운 부분이기도 하다.

 

대학 졸업 직후 시작된 긴 도피생활은 내 삶의 설계도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렸다. 나는 한때 이탈리아의 시인 살바토레 과시모도나 프랑스 시인 생 종 페르스처럼 글을 쓰는 외교관을 꿈꾸기도 했다. 그런 꿈이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슴푸레한 겨울 새벽 진해의 경화정거장에서 기차를 타는 순간, 모든 꿈은 수포로 돌아가버렸다.

 

그때는 그런 줄도 몰랐다. 왜냐하면 장교후보생은 주마다 치르는 영어, 논문 시험에서 낙제점만 받아도 그날로 퇴소시키곤 했던 것이다. 낙제점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동료 후보들도 많이 보았다. 만약 내가 특수 군대의 장교가 되는 걸 원치 않는다면 주마다 치르는 시험지를 백지로 제출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하지 않고 이 특수 군대의 오랜 전통인 폭력과 구타에 대해 상급자들에게 항의하고 심지어 별을 단 부대의 최고지휘자 방에 뛰어들어가 훈련과정의 구타를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했다. 나의 무모한 행동은 곧 집단체벌과 구타의 응답으로 돌아왔다. 나는 모두가 잠든 시간에 바다로 뛰어들었다.

 

바다 쪽에 제방이 설치되어 있어서 수심이 그다지 깊지 않을 거라는 믿음은 있었다. 그러나 막상 바다로 뛰어들었을 때 물이 목에까지 차올랐다. 헤엄도 칠 줄 모르는 내가 어떻게 그 제방을 건너서 서치라이트를 피해 육지에 다달았는지 그 과정을 나는 세밀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거기서 십리 길을 걸어서 경화 정거장에 도착한 뒤 나는 새벽 상경열차에 오를 수 있었다.

 

대전에 공군에 근무하는 남편을 둔 누이가 살고 있었다. 물에 젖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잠시 누이 집에 들렀는데 내가 옷을 갈아입을 때 얼핏 내 엉덩이와 허벅지를 엿본 누이가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몸의 하반신이 온통 시커멓게 멍들어 있었던 것이다. 강군 육성을 구실로 매일 밤 자행되는 몽둥이 찜질의 흔적이었다.

 

흔히 ‘빠따’라고 하는 이 체벌은 이차대전 때 일본군이 남겨준 관행으로 보여진다. 나에게는 이 맹목의 체벌이 물리적 고통보다 정신이 파괴되는 것 같은, 인간으로 최소한의 자존감조차 유지하기 힘든 모욕감을 안겨주는 고통이 더 컸다. 절박한 위기감이 나를 엄습했다.

 

뒷날 대령으로 예편한 당시의 동료가 나를 찾아와서 말했다.

 

“우리 동기들은 모두 자네를 만나보길 원해. 자네가 가고 난 뒤 확실히 체벌은 많이 줄었거든. 그들도 충격을 받은 것 같았어.”

 

대령 예편자는 동기들 모임에 나를 몇 차례나 초대했다. 그러나 낙오자인 나는 거기에 나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