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감이 써준 매도증서에 지장을 찍고 일금 삼천 원을 받았다. 계단을 내려오는데 자꾸 속았다는 생각이 떠올라 견딜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올라가서 물릴 용기도 나지 않았다.

 

논골의 저녁나절은 유난히도 어두컴컴하다. 가로등이 한 군데도 설치되지 않았고 가게들도 전기를 아끼느라고 창 바깥까지 조명 시설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녁 여섯시만 지나면 논골의 큰길조차 어느 산간 오솔길처럼 쓸쓸하고 어둑어둑해서 눈앞으로 다가오는 인간의 얼굴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날 나는 운수가 매우 사나왔다. 시계를 예상보다 헐값에 팔아치웠을 때부터 어쩐지 예감이 불길하더니 급기야 논골의 저녁나절을 지배하는 그 어둠 때문에 엉뚱한 피해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 사건은 또한 성애와 나 사이를 더욱 가깝게 밀착시킨 계기가 되어주기도 했다.

 

오랜만에 거금을 호주머니 속에 넣고 나는 약간 마음이 느긋해졌다. 그래서 호주머니 속에 손을 찌르고 고개의 오르막길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이 거액을 한꺼번에 성애를 위해 써 버릴까, 아니면 조금 분배해서 자신의 개비 담뱃값과 커피 값으로 예비해둘까, 그런 문제를 궁리하고 있었는데 사진관 옆 골목에서 문득 남자들의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진관은 백조다 방 아랫충에 있었고 그 옆 골목은 시장 부지로 정해 놓은 공터로 들어가는 입구였는데 사람들이 이 부근에 모여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달려갔다.

 

어두워서 누가 누군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누가 싸움꾼이고 누가 구경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한 결과 한 사내를 셋이나 되는 놈팡이들이 합세해서 공격하고 있었다. 당하는 녀석은 맹렬하게 저항했다. 그럴수록 그가 받는 피해는 더 심한 것 같았다.

 

누구의 입에선지 비명이 들렸고 그때마다 구경꾼들이 이쪽으로 저쪽으로 휩쓸렸다. 과연 이날 밤의 소동은 고요한 논골의 저녁나절에서는 흔치 않은 구경거리였으며, 그래서 사람들은 몰염치스럽게 싸움을 말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몇 분 동안 격렬한 싸움이 진행되고 있을 때 갑자기 호각소리가 등 뒤로부터 귀청을 찢을 듯이 크게 들렸다. 고개 너머 파출소에서 경관들이 급거 출동했던 것이다. 구경꾼들이 순식간에 홀어졌다. 싸우던 놈들도 혼비백산해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때 별안간 누군가가 내 팔을 왁살스럽게 붙잡았다. 돌아다봤더니 경관이었다.

 

“따라와”

 

내 팔을 붙잡고 손을 놓지 않은 채 경관이 말했다.

 

“왜 그러오?”

 

“잔말 말고 따라와!”

 

경관은 생각보다 힘이 셌다. 그는 내 항변 같은 것은 귀담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완강하고 사나운 완력으로 나를 잡아끌고 갔다. 나중에 봤더니 현장에서 파출소까지 끌려온 놈은 매를 맞고 있던 놈과 나 둘뿐이었다. 집단폭행을 가하던 놈들은 재빨리 도주해버렸던 것이다.

 

“이거 봐요. 난 구경꾼이었어요. 구경꾼도 잡아다 가두는 법이 있나요?”

 

나를 끌고 왔던 경관에게 나는 큰소리로 대들었다.

 

“야, 임마, 누굴 장님 취급할 생각이냐? 난 네 녀석이 주먹을 휘두르는 걸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한 번만 그 따위 수작 다시 부려봐. 그땐 하수구멍에다 대가릴 처박아 줄 테니깐.”

 

머리가 커다란 경관이 눈을 부라리며 불호령을 내렸다. 그래도 난 다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저 친구에게 물어보슈. 내가 그 패거리 중의 한 놈이냐고.”

 

경관이 매맞은 놈에게 농담하듯 물었다.

 

“이 녀석이 널 때린 놈 중의 하나지? 틀림없지?”

 

“맞아요. 저놈도 합세해서 날 때린 놈 중의 하나예요.”

 

그 미련한 녀석은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