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참 경찰관이 자기 자리로 가서 털썩 주저앉으며 혼잣말로 중얼 거렸다, 그리고 곧 경관 두어 명이 새로 출근했는데 모두 간밤에 못 보았던 얼굴들이었다. 나를 본서로 연행할 시간이 다가온 것 같았다.
당직 경관이 전화통을 붙잡고 오랫동안 본서와 통화를 했는데 대화 내용이 어제 사건의 전말과 피의자의 이상야릇한 반항적 태도에 관한 것이었다. 그가 통화를 끝내자 파출소 실내는 조용해졌다. 나는 매우 초조했다. 중인도 보호자도 없는 무기력한 피의자, 그래서 도리 없이 집단폭행 사건의 주모자가 감수해야 할 가시밭길을 혼자 걸어가야 한단 말인가?
바로 그 순간에 내게 연고자가 나타났다는 건 천우신조라고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파출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웬 아가씨가 몹시 성난 얼굴로 뛰어 들어왔는데, 그녀는 다른 사람 아닌 성애였다.
나는 우선 그녀의 옷차림에 놀랐다. 파란 바지에다 베이지색 멋장이 스웨터를 입고 있었는데 그녀가 그렇게 세련된 의상으로 내 앞에 나타나긴 처음이었던 것이다. 성애는 저런 옷을 가방이나 보따리 속에 감춰 갖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만 입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옷도 입을 줄 모르는 촌뜨기라고 생각한 건 나의 오해였다. 성애는 완전히 다른 여자로 보였으며 특히 파출소 안으로 들어와서 그녀가 취한 행동은 안하무인이라고 하는 게 옳았다.
“어떻게 된 거예요?”
옆에 앉아있는 경관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장 구석 의자에 앉아 있는 내게 다가와서 그녀가 물었다.
“어떻게 되긴. 난 싸움 구경하다 깡패로 몰려 이렇게 끌려왔을 뿐이오.”
“내 참 우스워서. 그래, 한마디 항변도 못하고 벙어리처럼 여기서 밤을 지샜단 말예요?”
“항변해도 소용없어요. 증인이 없으니까.”
“피해자는 누구예요? 어디 있어요? 피해자가 알 거 아네요?”
“그 녀석은 내보냈소. 그 녀석이 내가 자기를 때린 패거리 가운데 하나라더군. 뭐가 뭔지 나도 모르겠어요.”
“그런 바보자식, 내 앞에 있다면 내가 그런 놈을 가만둘까봐!”
성애는 당직 경관 앞으로 기세 좋게 다가섰다.
“이거 봐요. 당신네들, 이 사람 증거를 확보하고 붙잡아두는 거예요?”
그녀는 마치 고관대작이나 백만장자의 규수처럼 거만하고 당당하게 굴었다.
“어, 아가씨 누구요? 저자하고 어떻게 되는 사이죠?”
“우리 오빠예요., ’
“오빠라구? 방금 이 친구는 연고자가 없다고 말했는데. 정말 아가씨가 이 친구 여동생이란 말이지?”
“그렇대두요. 남의 말 함부로 의심 말아요.”
“그럼, 우리가 연락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고 왔지?”
“동네 사람들이 알려줬어요. 우리 오빠가 죄없이 끌려갔다구. 우리 집은 저기 라디오 가게 아랫골목에 있어요. 의심나면 나하구 같이 가봅시다.”
“이 친구도 거기 산단 말이지?”
“그래요.”
“아까는 주거지도 없다고 했어. 뭔가 수상한데!”
“오빠, 왜 잠자코 있어요? 지금 집에 함께 가자고 하면 될 거 아니에요?”
성애가 나를 흘겨보았다. 경관이 말했다.
“아가씨 말이 사실일지라도 저자는 남을 때렸어. 풀어줄 수 없다구!”
“어떻게 때렸어요? 때리는 걸 틀림없이 봤나요?”
“봤지. 주먹으로 마구 패더군.”
“호호호호, 오빠는 환자예요. 그만한 힘이 없다구요. 거짓말도 썩 잘 하시네요. 의사에게 가봅시다. 오빠가 치료받는 병원이 있으니까 지금 나랑 같이 가봐요. 만약 사실이 아니라는 게 밝혀지면 당신을 고발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