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애는 집으로 돌아와서 우선 할매와 같은 방을 사용했다. 그녀가 돌아왔던 첫날 김유생 노인이 딸을 불러놓고 비교적 온건한 말씨로 그간의 행적을 캐물었지만 성애가 끝내 묵비권을 행사했기 때문에 그 문제도 그냥 덮어둔 채 지나가 버렸다.
어느덧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정상적인 식사를 하지 못하는 나의 불편은 여전했다. 그러나 나는 저녁때면 자주 산을 올라갔고 산의 정상에 서서 무당의 집에서 들려오는 북소리를 듣곤 했다. 성애는 그날 이후 좀처럼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영감의 단속이 심한 탓일까? 아니면 그녀 스스로 어떤 결심을 했단 말인가?
아무튼 며칠 뒤면 다시 나가 버리겠다고 그녀가 처음 말했던 것과는 달리 보름 동안이나 그녀는 집안에 꼭 숨어 지냈다. 그런데 내가 아주 뜻밖의 장면을 목격해 버렸다.
저녁나절 내가 모처럼 푼돈이 생겨서 한 잔의 커피를 마시려고 고갯마루 백조 다방에 들어갔는데 거기에 뜻밖에도 성애가 웬 사내와 나란히 앉아 있었던 것이다. 사내와 그녀는 출구로부터 돌아앉아 있었기 때문에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갑자기 겁이 더럭 났지만 호기심에 못 이겨 그들의 뒷좌석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사내가 말했다.
“일단 너를 찾았으니 놓아줄 수 없다. 내가 호락호락 놓아줄 것 같애? 그렇다면 여기까지 널 찾아오지도 않았게?”
“닷새 있다 틀림없이 돌아갈께요. 몸이 아파서 할 수없이 왔다니까요. 내가 약속을 어기는 것 봤어요, 김씨? 어긴다면 그땐 김씨 맘대로예요. 닷새 뒤에 내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땐 여기 와서 뭐라고 해도 난 할 말 없죠 뭐. 그렇게 해요, 김씨. 내가 뭐 누구 속이는 것 봤어요? 한 번만 봐달라니까 그러네.”
성애가 사내의 팔을 잡고 있었다. 사내는 묵묵부답이었다. 그 녀석은 고수머리에 상체가 잘 발달된 서른 살 남짓의 사내였다. 오랜 만에 사내가 말했다.
“그럼 좋다. 닷새 뒤에 네가 올 것 없이 여기서 우리 만나자. 내가 데리러 오겠다. 여섯 시에 이 다방으로 나와. 알겠어?”
“알구 말구요, 김씨. 고마와요. 정말, 여섯 시에 틀림없이 여기로 나올께요.”
“약속 어기면 그땐 알지? 내 성질 잘 알 거야.”
“아이구, 잘 알고 있대두 그러네. 자, 나가요.”
둘이 일어나서 바깥으로 나갔다. 이번에도 그녀는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워낙 백조 다방의 실내가 어둡고 담배 연기가 자욱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곧 뒤따라 나왔다. 계단을 내려와서 행길로 나서자 성애가 금방 사내와 작별하고 비탈 아래로 깡충깡충 뛰어갔다. 그녀가 아래 골목으로 숨어 버리기 전에 나는 그녀를 따라 잡았다.
“김씨가 누구요? 그 녀석 수상하던데.”
“아이구, 깜짝이야? 난 그 새끼가 다시 쫓아온 줄 알았다구. 혼줄이 달아났네. 이씨 엿들었군요. 언제 다방에 들어왔어요?”
“커피 한 잔 사지 않겠소?”
“돈 없어요. 커피 금방 마시지 않았나요?”
“들어갔다 그냥 나왔어요. 내가 커피 살께 백조 다방으로 다시 갑시다.”
“싫어요. 그 새끼 또 나타날까봐 무서워.”
“그럼, 저기 지하실 여왕 다방으로 가요.”
“거긴 영감이 잘 다니지요.”
“노인은 벌써 다녀갔어요. 저녁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는 걸 아가씨도 알지 않나?”
“그래요, 그럼.”
여왕 다방은 큰길 맞은편 지하실에 있는 다방이다. 백조 다방이 건달과 깡패와 일당 노동자들의 안식처라면 여왕 다방은 논골 유지와 관리와 노인네들 사랑방이다. 성애는 누가 볼까 봐 잔뜩 웅크리고 다방 구석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