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벌떡 일어섰다. 자신감에 찬 내 얼굴을 성애가 존경어린 눈초리로 우러러 보았다. 그녀가 그런 눈초리로 나를 쳐다본 건 처음이다. 돈을 구하겠노라는 그 한마디로 사기꾼인 나를 달리 보게 된 것일까? 이번에는 성애가 내 말을 믿는 것일까?
그렇지만 내가 무슨 뚜렷한 마련이 있어서 그런 말을 한 건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일종의 허세였다. 순간적으로 격분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동정한 나머지 부려본 허세였다. 아니, 그보다도 성애가 평소 나를 우습게 보는 데 대한 반발로 그래봤을 뿐이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뿌린 씨앗은 거둬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 돈을 구하나. 하긴 궁리해볼 건덕지조차 없다. 갑자기 어디 가서 방 하나 얻을 돈을 구한단 말인가. 그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아예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삼일 뒤에 기막힌 생각이 전광석화처럼 내 뒤통수를 때렸다. 그렇다. 여태 그걸 잊어 먹고 있었다. 그거라면 아직 몇 푼 더 뜯어낼 수 있을 것이다. 고개마루턱을 지나 시내로 나가는 길목에는 전당포가 하나 있었다. 몇 달 전에 나는 시계를 그 집에 맡겨둔 일이 있다. 아직 팔아넘기진 않았으니까 그때 빌려 쓴 돈을 공제하고도 그 시계는 상당액을 내게 보장하고 있을 게다. 그걸 팔아넘기는 경우에 말이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바깥으로 나갔다.
승리사 전당포 간판은 몇 달이 지난 뒤에도 의연하게 그 자리에 걸려 있었다. 가게는 삼층 건물의 이층에 있었는데 가게 규모에 비해 간판이 유난히 거대했기 때문에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공연히 위압감을 주곤 했다.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는 건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특히 이 논골 주민들에게는 무슨 위대한 거물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해가 기울었지만 아직까지 문을 닫으려면 반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나는 승리사 전당포의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서둘러 올라갔다. 마침 영감이 접수창구에 앉아서 확대경을 손에 들고 뭔가를 열심히 관찰하고 있다가 손님이 나타나자 얼른 그 물건을 신문지로 덮어버리고 아무 일도없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손님을 쳐다봤다.
“무슨 일로 오셨소?”
영감이 은밀한 즐거움을 발각 당했다는 듯 불쾌한 표정으로 쌀쌀하게 말했다. 순간 나는 그가 신문지 밑에 감추고 있는 게 대단히 값비싼 보석이거나 어떤 희귀한 기념품일 거라고 단정했다. 동시에 어울리지 않게도 매우 대담한 상상을 해보았다. 지금 내게 무기가 있다면 이 영감을 협박해서 그 보물을 탈취해 가지고 귀신도 모르는 곳으로 잠적해 버릴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며칠 뒤에는 엄청난 값으로 그걸 처분한 뒤 성애를 데리고 멀리 아주 멀리 달아난다. 물론 그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내게 현금만 있다면 성애는 두말 없이 나를 따라올 것이다. 그러나 내 손엔 무기도 없고 그리고 나는 자신의 그런 상상에 지레 겁을 먹고 움찔했다.
“무슨 일로 왔냐구?”
영감이 기다리다 못해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꽥 질렀다. 그제서야 나는 바지 호주머니를 뒤져 내 시계의 전당표를 겨우 끄집어냈다.
“이거 좀 봐 주세요.”
나는 꼬깃꼬깃한 전당표를 창구 안으로 디밀었다. 그 종이쪽지에는 내가 방금 상상을 통해 그려봤던 금액과는 엄청나게 거리가 먼 소액이, 단지 삼천 원이 적혀 있었다. 나는 기분이 위축될 대로 위축되었다.
“이건 넉 달치 이자가 고스란히 밀려 있군. 물건을 찾아가려고? 벌써 무효가 된 거지만 특별히 물건을 반환해주지. 아자까지 포함해서 사천 이백 원 내슈.”
빨리 끝내고 나가 달라는 듯 영감이 서둘렀다.
“아닙니다. 찾으려고 온 게 아니에요.”
“그럼 뭐요?”
“그걸 팔 수 없을까요?”
“여기 보관했던 당신 시계를 팔겠다구? 우린 그런 물건 안 사요”
“사주세요. 보시다시피 병원에 갈 돈이 필요하다구요. 그렇지 않으면 팔고 싶지 않은 시계예요.”
“그게 얼마나 나갈 것 같소?”
“값은 영감님이 알아서 처리해 주세요.”
“내가 알아서 하라구? 그렇다면 내가 봐주는 셈치고 말해보지. 이천 원 얹어 주면 어떠오? 사천 이백 원과 이천 원, 벌써 육천 원을 초과했소. 육천 원 가지고 요새 시장에 나가면 새 것도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죠?”
“이천 원은 너무 하십니다. 지난번 처음 여기 왔을 때 이런 건 새 거라면 십만 원은 넉넉히 호가한다고 영감님이 분명히 말씀했죠? 한데 어떻게 이천 원입니까?”
“내가 그런 말을 했을 까닭이 없는데. 여보, 젊은이, 가령 내가 그런 말을 했더라도 그건 새 거라면 그렇다는 얘기 아니오? 새 거라면 그렇게도 하겠지. 싫소? 그럼 관둡시다.”
“아닙니다. 조금 더 생각해 보십쇼. 오늘 그걸 팔지 않으면 곤란한 일이 있어요.”
“나더러 알아서 달라고 해놓고 그렇게 투정하면 난 못 사요. 남의 헌 물건 사놓고 욕먹기도 싫고.”
“이천 원 더 올려주지 않겠습니까?”
“하하, 배포가 대단한 사람이군. 천 원이라면 혹 몰라도 그렇게 갑절이나 한꺼번에….”
“좋아요. 천원 더 주십쇼.”
“이거 내 가게 생긴 뒤로 처음 있는 일인 줄이나 아쇼. 그리고 여기 매도증서에다 도장이나 찍어요. 도장이 없으면 손도장을 찍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