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애는 아주 대담하게 나왔다. 경관이 그녀에게 쩔쩔 매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성애는 경관더러 빨리 그녀와 동행해서 의사에게 가보자고 재촉했다. 십 분쯤 실랑이가 벌어진 끝에 고참 경관이 당직 경관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지껄였다. 그런 다음 나는 곧 거기서 풀려 나왔다.

 

고갯길에는 출근하거나 등교하는 행렬이 어느덧 자취를 감춰 버린 뒤였다. 겨울 햇빛이 부옇게 논골의 분지를 비쳐 주고 있었다. 나는 성애의 수완에 몹시 놀랐으며 감탄의 말이 입에서 저절로 나왔다. 사실 이 근처의 다른 아가씨들 가운데 경관을 그만큼 만만하게 다룰 줄 아는 아가씨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대개 뚜렷한 죄목이 없는 경우에도 경관 앞에서 오들오들 떨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성애의 그런 배짱과 용기는 어디서 나왔을까? 그녀는 가출해서 바깥을 떠도는 동안에 세상살이의 요령을 그만큼 터득한 것일까? 그리고 일단 논골로 돌아와서 지낼 동안은 자기 본색을 감쪽같이 감추고 다시 어수룩한 촌뜨기 행세를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의상에까지 분명 신경을 쓰고 있었다. 방금 파출소에 나타날 때 입고 있던 멋장이 스웨터와 바지는 성애가 여기서는 한 번도 입지 않던 옷이었다.

 

나는 변신한 성애가 갑자기 두려웠다. 그녀도 나의 그런 기분을 눈치 챘는지 파출소를 나와서 고개를 넘어오는 동안 좀처럼 먼저 말을 붙여오지 않았다. 흡사 나는 성애 아닌 다른 여자와 함께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우리가 사진관 앞까지 다가왔을 때 아무래도 둘 사이의 침묵이 쑥스러웠던지 성애가 돌연 내 앞으로 뛰어와서 얼굴 을 붉히며 말했다.

 

“배가 고플 텐데 뭘 먹고 싶지 않아요?”

 

“별로 생각이 없는데요.”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성애가 얼굴에 가벼운 화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녀는 전보다 좀더 예뻐 보였다. 파출소에서 처음 그녀를 봤을 때부터 나는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안 돼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으면 더 나빠진다구요. 우유하고 카스테라 조각이라도 우선 먹어뒤요.”

 

그녀는 진짜 누이처럼 내 의사도 듣지 않고 근처의 구멍가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우유 한 병, 어린이 간식용의 작은 카스테라 한 조각을 들고 내게 돌아왔다.

 

“데워달라고 했더니 불이 없대요. 내가 다방 언니에게 가서 데워달랄 테니 백조 다방으로 올라와서 잠깐만 앉아계셔요.”

 

이맘때는 다방이 텅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 나도 망설이지 않고 백조 다방으로 성애를 따라 올라갔다. 그녀는 주방으로 손수 들어가서 한참 동안 머물러 있더니 잠시 후 데운 우유와 카스테라 조각을 얹은 쟁반을 들고 내가 앉아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왜 그 녀석들의 의심을 받게 됐어요? 어젯밤 술 마셨어요?”

 

“술 마실 돈이 어디 있소? 지금 난 마시고 싶어도 못 마셔요?”

 

“아 참, 그러네요. 그런데 왜 의심을 받았을까. 생각할수록 우습고 이상해요. 우습지 않아요? 환자가 갑자기 깡패로 둔갑했으니.”

 

“난 우습지 않소. 이 동네는 뭔가 이상해. 사람들이 모두 백지처럼 멍청하구 무관심하다구. 멀쩡한 사람이 끌려가도 누구하나 증인이 되어 줄 생각도 않고 멍청하게 구경한다구요. 게다가 그 매맞은 녀석이나 경관은 또 어떻구? 마치 난폭한 장님들처럼 위험한 놈들이야. 난 논골이 싫어졌어요. 겁나고 왠지 무서워. 여기 머물러 있다간 잘못되어서 살인혐의를 뒤집어쓰고 끌려갈지 누가 아나요? 어제처럼 운이 나쁘면 그렇게 될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구요.”

 

“여길 떠나고 싶어요?”

 

“떠나고 싶고 말구요.”

 

“그래서 떠나기로 했나요?”

 

“아니, 아직. 하지만 곧 떠날 거요. 내가 여기 오래 있을 수 없다는 건 어젯밤에 알았어요.”

 

“어디로 가실 건데요?”

 

“나야 갈 곳이 있어요. 아무 때나 떠날 거요, 어느날 갑작스럽게- 아무도 모르게시리 꺼져 버리겠소.”

 

“천당으로 갈 거예요? 이씨는 그곳을 알고 있다고 했죠? 알고 있다면 내게도 좀 가르쳐줘요. 나도 내일은 어디로 달아나야 하니까.”

 

“참, 내일 그녀석이 오는 날이오?”

 

“모레예요. 하지만 하루 먼저 떠나는 게 안전해요. 만약 모레 나 가다가 그녀석과 부닥쳐 봐요. 난 끝장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