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설마, 윤 참판이 허숭이로 정선의 사위야 삼을라고."
이렇게 생각하고 갑진은 한번 더 숭을 바라보았다.
"나, 김갑진을 두고 누가 정선의 남편이 되랴."
이렇게 갑진은 속으로 믿어왔던 것이다. 대학만 졸업하는 날이면 자기는 정선과 혼인을 하고, 그리 되면 정선은 적더라도 천석 하나는 가지고 올 것이요, 또 그리고-이렇게 다 셈쳐놓았던 것이다. 혹시 갑진에게 청혼하는 집이 있더라도 갑진이가,
"아, 나는 아직 혼인할 생각 없소. 공부하는 사람이 혼인이 무슨 혼인이오"?
하고 뽐낸 것도 다 이러한 배짱이 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갑진에게 있어서는, 가난한 귀족의 아들인 그에게 있어서는 혼인이란 재물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여자야 어디는 없느냐. 카페에 가도 수두룩하고 여학생을 후려내더라도 미처 주체를 못할 형편이다. 오직 돈 있는 아내-그것이 갑진에게는 가장 귀하고 또 필요품이었다.
그런데 윤 참판집 작은사랑을 독차지한 대장부 허숭을 대할 때에는 갑진의 분홍빛 장래에는 일종의 회색 안개가 낌을 아니 깨달을 수 없었다.
"자네 한턱 내야겠네그려."
하고 갑진은 소침한 기운을 억지로 회복하여 농치는 웃음을 웃으며 숭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한턱? 줄행랑에서 이리로 승차한 턱인가"?
하고 숭도 웃었다.
"암, 자네 조상 적에야 윤 참판집에 오면 정하배할 처지 아닌가. 이만하면 자네 고향에 가면 소분(掃墳)해야겠네그려."
하는 갑진의 말은 농담을 지나서 일종의 독기를 품었다.
"마찬가지지."
하고 숭도 농담으로 대꾸를 하였다.
"무엇이 마찬가지여"?
"우리 조상같이 시골 사는 상놈은 자네네 같은 양반집에 정하배를 하였지마는, 그 대신에 자네네 같은 양반은 호인의 집에 정하배를 하였거든. 지금은 일본사람의 집에 정하배를 하고… 안 그런가."
갑진의 얼굴에 떠돌던 빈정거리는 웃음이 사라지고 낯빛은 파랗게 질리려 하였다.
"갑진군. 자네는 너무도 양반에 관심을 가지는 모양이야. 지금 우리 조선사람은 모조리 세계적 시골뜨기요 상놈이 아닌가. 그런데 이 조그마한 조선, 몇 명 안되는 조선사람 중에서 양반은 다 무엇이고 상놈은 다 무엇인가. 서울사람은 다 무엇이고 시골사람은 다 무엇인가. 또 관립학교는 다 무엇이고 사립학교는 다 무엇인가. 김갑진이나 허숭이나 다 한 가지 이름밖에 없는 것일세-<조선사람>이라는."
"상놈인 걸 어쩌나. 자네 같은 사람은 특별하지만 시골놈은 원체 무지하거든. 내흉하고, 또 시골놈들이란 지방열이 강해서 서울사람이라면 미워하고 배척한단 말야. 안 그런가. ○○학교로 보더라도 교장이 시골놈이니깐으로 교원들도 시골놈이 많거든. ○○은행도 안 그런가. ○○신문사도 안 그런가. 그러니깐으로 시골놈들이 고약한 게지, 우리네 서울사람 탓이 아니란 말야. 그야말로 인식 착오, 자네의 인식 착올세, 인식 착오."
하고 갑진의 말은 연설 구조다.
"그건 안되는 말야. ○○학교에 시골사람이 많다고 하나, ○○학교에는 서울 사람뿐이 아닌가. ○○은행에는 시골사람이 있던가. ○○신문사에는 대부분이 서울사람이 아닌가. 그러면 그 기관들이 다 서울사람들의 지방열로 나온 기관이란 말인가. 자네 눈에는 시골사람만 눈에 띄우는 게지. 서울사람들만 있는 것은 당연한 일로 보이고, 시골사람이 한두 사람 섞이면 아마 수상하게 보이는 겔세. 아마 옛날부터 조정에는 시골 상놈은 하나도 아니 섞이고, 뉘 집 자식이라고 알 만한 사람들끼리만 모여 있다가, 보학에 들지 아니한 시골사람이 하나 옥관자라도 얻어 붙이면 변괴로나 알던 그 인습이 남아 있는 게지.
그렇지만 자네 같은 고등교육을 받는 사람까지 그런 생각을 가져서 쓰겠나. 자네와 나와 같이 친한 경우에야 무슨 말을 하기로 허물이 있겠나마는 시골놈, 상놈 하고 입버릇이 되어 말하면 민족 통일상 불미한 영향을 준단 말야. 자네나 내나, 더구나 자네와 같이 귀족의 혈통을 받은 사람이 나서서, 양반이니 상놈이니 서울놈이니 시골놈이니 하는 걸 단연히 깨뜨리고, 오직 조선사람이라는 한이름 밑에 서로 사랑하도록 힘써야 될 것 아닌가."
숭의 말에는 정성과 열이 있었다.
갑진은 눈을 멀뚱멀뚱하고 듣고 앉았었다. 숭은 그가 의외에 빈정대지도 않고 듣는 것을 기쁘게 여겼다. 그러나 숭의 말이 다 끝난 뒤에 갑진은,
"인제 시조 다 했니? 이런 전쑥이. 누굴 보고 강의를 하는 게냐, 훈계를 하는 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