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참판의 슬픔은 돈이 구제할 수 있었다. 돈은 윤 참판의 삼위일체신 중에 제 일위다. 첫째가 돈, 둘째가 계집, 세째가 아들. 비록 인선이가 죽었다 하더라도 아직 미거하나마 예선이가 있고, 또 돈이 있지 아니하냐.
백만 원 가까운 돈을 주고 받아들이고 지키고 하는 사무는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비록 밑에 부리는 사람이 많다 하더라도 사람도 유만부동이다. 은행 통장이나 도장이라도 맡길 만한 사람은 인선이밖에 없었는데, 이 충실한 사무원 하나를 잃은 것이 아들을 잃은 데 지지 않을 큰 타격이었다. 그래도 윤 참판은 아들의 장례가 끝나자 곧 예사대로 생활을 계속하고 사무를 계속하였다. 비록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은 있다 하더라도.
그러나 인선의 처 정옥에게는 무엇이 있느냐. 이러한 가정에 자라고 이러한 교육을 받은 여자로, 특별한 천품이나 있기 전에는, 남편과의 재미와 새 옷 만드는 낙밖에 있을 수 없지 아니하냐. 새 옷도 남편을 위하여 입는 것이 주라 하면, 남편 인선을 잃은 정옥에게는 슬픔, 캄캄함, 막막함밖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예전에는 늙은이의 마누라인 시어머니(학교 시대에는 서너 반 윗동무다)라 하여 속으로 멸시하던 이가 도리어 청승스러운 청상과부라고 자기를 멸시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게다가 자식이라도 있으면 그것으로 잊기도 하련마는, 정옥은 일남 일녀를 낳아 다 말도 하기 전에 죽이고, 한번 낙태를 하고는 다시 소생이 없었다.
무시로 정옥의 방에서 들리는 울음소리-그것은 차마 못 들을 것이었다. 그를 위로하는 이로는 오직 정선이가 있을 뿐이나, 구월 새학기가 되어서 정선이 마저 낮에는 온종일 학교에 가게 되어서부터는 정옥은 혼자 한없이 울 뿐이었다. 친정이나 가까우면 거기라도 가련마는 그의 친정은 충청남도 예산(禮山)이었다. 게다가 아버지도 어머니도 다 돌아가고, 간댔자 난봉 오빠와 올케가 있을 뿐이었다.
허숭은 그럭저럭 이 집에는 없지 못할 사람이 되었다. 한 가지, 두 가지 심부름을 시켜본 윤 참판은 차차 숭을 신임하게 되어 은행 예금, 서류 정리, 통신을 맡게 되어, 마치 윤 참판의 비서 모양으로 되고 마침내는 가장 비밀한 장부까지도 맡아서 아들이라는 자격을 제하고는 인선이가 보던 사무 전부를 맡게 되었다. 윤 참판은 숭을 줄행랑에서 옮겨서, 인선이가 있던 작은사랑에 있게 하고, 하인들도 차차 <시골 서방님>이니 <학생>이니 하는 칭호를 고쳐서 <작은사랑 서방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숭은 이 복잡한 사무가 공부에는 방해를 줌이 적지 아니하였지마는, 늙은 윤 참판의 신임이 결코 불쾌하지는 아니하였다. 더구나 예전 같으면 인사를 해도 잘 받지도 아니하던 문객들까지도 이제는 제 편에서 먼저 인사를 하는 양이 통쾌도 하였다.
하루는 큰사랑에서 윤 참판의 지휘로 장부 정리를 하고 있는데, 김갑진이가 들어왔다.
갑진은 일본식으로 윤 참판의 앞에 인사를 하고는,
"자네 요새 승격했네그려."
하고 장부를 기입하고 앉았는 숭을 보고 빈정거렸다.
숭은 여전히 붓을 움직이며 픽 웃었다.
"이놈을 반포오(사무장에 해당하는 일본말)로 쓰십시오."
하고 갑진은 윤 참판을 향하였다.
윤 참판은,
"내 비서관이다."
하고 빙그레 웃었다.
"명년에 내 판사 되거든 재판소 서기로 써줄까."
하고 갑진은 허허허허 하고 웃었다.
"시골놈이 양반댁 청지기가 되면 명정(銘旌)에 고이고 위패(位牌)에 고이지 않나."
하고 갑진은 여전히 빈정대었다.
장부가 다 끝난 뒤에 숭은 갑진을 끌고 작은사랑으로 왔다.
갑진은 작은사랑에 숭의 모자와 외투가 걸리고 책상이 놓인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숭이가 작은사랑으로 승차한 것을 처음 보는 것이다.
"이게 자네 방인가"?
하고, 갑진은 눈이 둥그래졌다. 그는 진정으로 놀란 것이었다.
"아니, 인선군 방이지. 방이 비니까 날더러 같이 있으라시데그려."
하고,
"왜 섰어? 앉게그려."
하고 갑진에게 자리를 권하였다.
갑진은 숭이가 앉으라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숭이가 행랑으로부터 이 방에 올라오게 된 것을 보고 놀란 갑진의 심장은 용이히 진정되지를 아니하였다. 과연 윤 참판의 말마따나 숭은 서기나 청지기가 아니라 <비서관> 대우였다.
"그러나 설마-"
하고 갑진은 숭을 바라보았다. 숭의 손발이 크고 얼굴이 좀 거친 맛이 있는 것이 비록 시골티가 있다 하더라도, 아무리 시골사람을 낮추보는 갑진의 눈에도 숭은 당당한 대장부였다.
체격뿐 아니라 숭의 두뇌(이것은 갑진이가 심히 존중하는 것이었다)는 고보 시대부터 좋기로 이름이 있었다. 또 숭은 폿볼 선수(이것은 갑진이가 부러워하지 아니하는 것이었다)요, 일본말을 썩 잘하였다(이것은 갑진이가 심히 존중하는 것이었다). 만일 숭도 갑진과 대학에를 다닌다 하면, 갑진은 시골 상놈이라는 것밖에는 숭을 낮추볼 아무 조건도 없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갑진의 눈에는 조선사람이 하는 것은(자기가 하는 것을 제하고는) 다 낮게 보이고, 값없이 보였다. 그래서 숭을 사립전문학교 생도라고 보면 자기보다 한없이 떨어지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