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귀신 같은 놈들 잘 내쫓으셨습니다."

 

하고 안에서 나오는 것은 김갑진이었다. 갑진은 안에서 밤을 새운 모양이었다. 이러한 때에도, 그는 J자 붙은 검은 세루 대학 정복을 입고 손에 <大學>이라는 모장 붙인 사각모자를 들기를 잊지 아니하였다.

 

"인선이가 죽었다."

 

하고 윤 참판은 갑진을 보고도 같은 소리를 하였다.

 

"글쎄올시다. 그런 변고가 없습니다. 그 귀신 같은 놈들이 독약을 먹여서 그랬습니다. 애초에 제 말씀대로 입원을 시켰더면 이런 일은 없는 것을 그랬습니다. 그런 귀신 같은 놈들이 사람이나 잡지 무엇을 압니까."

 

하고 갑진은 모든것을 다 아는 듯이 단정적으로, 훈계적으로 말을 한다. 안하무인한 그의 성격을 발로한다.

 

"왜 의사는 안 보였다든"?

 

하고 윤 참판은 갑진의 말에 항변한다.

 

"의사놈들은 무얼 안다더냐. 돈이나 뺏으려 들지."

 

"애초에 조선 의사를 부르시기가 잘못이지요. 그깐 놈들, 조선놈들이 무얼 압니까. 요보놈들이 무얼 알아요? 등촌 박사나 이등 박사 같은 이를 청해보셔야지요. 생사람을 때려잡았습니다."

 

하고 갑진은 여전히 호기를 부린다.

 

윤 참판은 갑진을 한번 흘겨보고 일어나서, 무어라고 누구를 부르면서 안으로 들어간다.

 

허숭은 차마 갑진의 말을 들을 수가 없어서,

 

"거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하고 갑진을 나무랐다.

 

"왜? 자네 따위 사립학교 부스러기나 다니는 놈들은 가장 애국자인 체하고, 흥, 그런 보성전문학교 교수 따위가 무얼 알어? 대학에 오면 일년급에도 붙지도 못할 것들이. 자네도 그런 학교에나 댕기려거든 남의 집 행랑 구석에서 식은 밥이나 죽이지 말고, 가서 조상 적부터 해먹던 땅이나 파. 괜히시리 아니꼽게 놀고 먹을 궁리 말고…."

 

하고는 입을 삐죽, 고개를 끄덕하고 나가버린다. 아마 밤을 새웠으니까 졸려서 어디로 자러 가는 모양이었다.

 

허숭은 그만한 소리는 갑진에게서 밤낮 듣는 것이니까 별로 노엽게도 생각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서울사람, 시골놈, 양반, 상놈이 아직도 남았구나"하는 것을 한번 더 생각하고 한숨을 지을 뿐이었다.

 

그러나 허숭의 마음은 자못 편안하지 못하였다. "행랑 구석에서 남의 집 식은 밥이나 죽이고"하는 것이나, "아니꼽게 놀고 먹어 보겠다고" 하는 것이나, "조상 적부터 파먹던 땅이나 파!"하는 것이나, 갑진의 이런 말들은 갑진이가 생각하고 한 것과는 다른 의미로, 그의 경멸적인 의도와는 다른 의미로, 허숭의 가슴을 찌르는 바가 있었다.

 

그것은 사실이다. 조상 적부터 해먹던 땅파기가 싫어서 아니꼽게 놀고 먹어 보겠다고 시골 남녀 학생들이 서울로 모여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선조 대대로 피땀흘려 갈아오던 논과 밭과 산-그 속에서는 땀만 뿌리면 밥과 옷과 채소와 모든 생명의 필수품이 다 나오는 것이다-을, 혹은 고리대금에 저당을 잡히고, 혹은 팔고 해서까지 서울로 공부하러 오는 학생이나, 자녀를 보내는 부모나, 그 유일한 동기는 땅을 파지 아니하고 놀고 먹자는 것이다.

 

얼굴이 검고 손이 크고 살이 거칠고 발도 크고 눈이 유순하고 몸이 왁살스러운, 대대로 농촌의 자연에서 근육 노동하던 집 자식이 분명한 청년 남녀가, 몸에 잘 어울리지 아니하는 도회식 옷을 입고 도회의 거리로 돌아다니는 꼴-아무리 제깐에는 도회식으로 차린다고 값진 옷을 입더라도, 원 도회사람의 눈에는<시골 무지렁이, 시골뜨기>하는 빛이 보여 골계(滑稽)에 가까운 인상을 주는, 그러한 청년 남녀들이 땅을 팔아가지고, 부모는 굶기면서 종로로, 동아, 삼월, 정자옥으로 카페로, 피땀 묻은 돈을 뿌리고 다니는 것을 보면 일종의 비참을 느끼지 아니할 수 없지 아니하냐.

 

그렇게까지 해서 전문학교나 대학을 마친다 하자. 그리고는 무엇을 하여 먹나. 놀고 먹어보자던 소망도, 벼슬깨나, 회사원, 은행원이나 해먹자던 소망도 이 직업난에 다 달하지 못하고, 얻은 것이 졸업장 한 장과 고등 소비생활의 습관과 욕망과, 꽤 다수의 결핵병, 화류병, 자연속에서 생장한 체질로서 부자연한 도시 생활에 들어오기 때문에 생기는 건강의 장애와-이것뿐이 아닌가. 조상 적부터 해먹던 땅을 파자니 싫고, 직업은 없고, 그야말로 놀고 먹자던 것이 놀고 굶게 되지 아니하는가.

 

"나도 그 중의 하나다"

 

하고 숭은 낙심이 되었다. 도리어 갑진의 기고만장한 어리석음이 유리한 듯도 하였다.

 

안으로는 이따금 세 줄기 여자의 곡성이 흘러나왔다. 하나는 정선의 소리요, 또 하나는 죽은 인선의 아내 조정옥(趙廷玉)의 소리였다. 그리고 하나는 아마 인선의 계모의 소리일 것이다.

 

인선의 아내 조정옥은 재동 조 판서라면 지금도 양반 계급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는 이의 손녀요, 남작 조남익(趙南翊)의 딸이다. 재동여자고보를 졸업하고, 또 기모노에 하까마를 입고 제이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이 왕직 인연으로 동경도 한 일년 다녀온 여자다. 윤 참판집은 아들 복은 없어도 미인 복이 있다는 말을 듣느니만치 정옥은 미인이었다. 다만 위에 말하였거니와 그가 눈웃음을 치고 여염집 부녀로는 너무 애교가 많았다.

 

그리고 그가 받은 교육에는-가정에서는 물론이어니와, 보통학교나 고등보통학교나, 또 고등여학교나-개인주의, 이기주의 이상의 아무 자극과 훈련이 없었다. 애국이라는 말은 원래 조선 교육에서 찾을 수가 없거니와, 전 인류를 사랑하는 그리스도교적 인도주의라든지, 또 삼세 중생을 다 동포로 알고 은인으로 알아 그것을 위하여 제 몸을 희생하여 봉사하는 석가모니의 사상이라든지, 또는 조선사람이니, 조선사람의 불행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고 그들에게 조그마한 기쁨이라도 더하여주기 위하여 네 몸을 희생하라는 말이라든지, 또는 실제적 훈련이라든지는 받아보지 못하고, 기껏 부모에게 효도를 하라든지, 남편을 수종하라든지, 돈을 아껴 쓰라든지, 자녀를 사랑하고 깨끗이 거두라든지, 이러한 개인주의 내지 가족주의 이상의 교육과 훈련을 받아본 일이 없었다.

 

게다가 그의 친정인 조 남작집은 가정이 문란하기로 이름이 있는 집이요, 그의 시집인 윤 참판집도 금전에 대한 규모밖에는 아무 높은, 깊은, 넓은 인생의 이상이 없는 집이요, 정옥이가 교제하는 사람들도 거의 다 정옥과 어슷비슷한 개인주의자, 이기적 향락주의자들이었다.

 

이러한 정옥이가 삼십이 넘을락 말락 해서 남편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인생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다.

 

정옥은 절제를 잃었다. 그의 남편의 숨이 넘어간 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슬픔이 더하였다. 그는 마침내 완전히 절제력을 잃어 통곡하였다. 방바닥을 두드리고 풀어놓은 머리채로 목을 매려들고 한없이 울었다.

 

"언니, 언니."

 

하고 올케를 말리던 정선도 같이 울었다. 집안 어른들이,

 

"아버님 계신데 그렇게 우는 법이 아니다."

 

하고 책망하였으나, 정옥의 귀에는 그런 말이 들어오지 아니하였다.

 

"요새 계집애들은 저래서 병이야. 부모도 모르고 남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렇게 늙은 부인들은 정옥의 흉을 보았다. 그 늙은 부인들은 자기네가 젊었을 때에 지키던 엄격한 풍기가 깨어지는 것을 슬퍼하고, <요새 계집애>들의 방종한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