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반의 야학이 끝난 뒤에, 늙은 느티나무 밑에 남자들만 수십 명이 모여서 숭의 송별연을 열었다. 참외도 사오고 술도 사오고 옥수수도 삶아오고, 모두 둘러앉아서 이야기판이 벌어졌다.

 

"너 이번 가면 또 언제 올래"?

 

"글쎄요. 내년에나 오지요."

 

"조립(졸업)이 언제야"?

 

"내후년입니다."

 

"법과라지"?

 

"네."

 

"그거 조립(졸업)하문 경찰서장이나 되나"?

 

"……"

 

"군 서기도 되겠지. 군수는 얼른 안될걸."

 

"변호사를 하면 돈을 잘 버나보더라마는-그건 또 시험이 있다지"?

 

"네."

 

"걔야 재주가 있으니까 변호사도 되겠지."

 

"변호사는 사뭇 돈을 번대."

 

"돈벌이는 의사가 제일이야."

 

"큰 돈이야 그저 금광을 하나 얻어야."

 

"조선에야 돈이 있어야 벌지. 물 마른 것 모양으로 바짝 마른걸."

 

"우리네같이 땅이나 파먹는 놈이야, 십원짜리 지전 한 장 손에 쥐어볼 수 있다구!"

 

"자, 채미(참외) 한개 더 먹지."

 

"아암, 밤이 꽤 깊었는걸."

 

이러한 회화였다. 숭은 이러한 말을 들을 때마다, 혹은 낯도 후끈후끈하고, 혹은 한숨도 쉬었다. 그러나 숭은 이 무지한 듯한 사람들이 한없이 정답고 귀중하였다. 그들의 말속에는 한없는 호의가 있는 듯하였다. 저 인사성 있고, 눈치 밝고 쏙쏙 뺀 도회사람들보다 도리어 사람다움이 많은 것이 반가왔다.

 

이 밤에 숭은 협동조합 이야기를 하여 다수의 찬성을 얻었으나, 조직하기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이곳을 떠나게 되었다.

 

새벽차를 타려고 가방과 담요를 들고 당숙의 집을 떠나, 길가 풀숲에 우는 벌레 소리를 들으며 정거장을 향해 나갈 때에, 무너미로 갈리는 길에서 숭은 깜짝 놀랐다.

 

"내야요."

 

하고 나서는 유순을 본 까닭이었다. 숭은 하도 의외여서 깜짝 놀랐다가 부지불식간에 유순의 손을 잡았다.

 

"언제 와요"?

 

"내년 여름에 올께."

 

하고 숭은 자기의 가슴에 이마를 대고 기대어 선 유순의 머리를 쓸었다.

 

떠날 때에 순은 숭에게 삶은 옥수수 네 자루를 싼 수건을 주었다.

 

숭이가 탄 기차가 새벽 남빛 어둠속으로 씩씩거리고 지나 무너미 모루를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며, 순은 손을 내어두르며 눈물을 지었다.

 

숭은 무너미 모루를 돌아갈 때에 행여나 순이가 보일까 하고 승강대에 나와서 바라보았다. 그러나 새벽빛은 반 마일이나 떨어져 산 그늘에 서 있는 처녀의 몸을 숭의 눈에서 감추었다. 숭은 순이가 섰으리라고 생각하는 방향을 향하여 손을 두르며,

 

"순이 내 내년 여름에 올께."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차는 살여울의 철교를 건넌다. <살여울!> 어떻게 정다운 이름이냐, 하고 숭은 철교 밑으로 흐르는 물을 들여다보았다. 아직도 여름 밤을 머금은 검은 물. 눈이 그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초가을의 특색인 골안개가 뽀얗게 엉긴 것이 보인다.

 

촉촉하게 젖은 땅 위에, 들릴락말락한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물 위에 꿈같이 덮인 뽀얀 안개, 그것은 자연의 아름다움 가운데 가장 인정다운 아름다움의 하나다.

 

살여울의 좌우 옆은 살여울 물을 대어서 된 논이다. 한 마지기에 넉 섬씩이나 나는 논이다. 본래는 그것은 풀이 무성한 벌판이었을 것이다. 혹은 하늘이 아니 보이는 수풀이었을 것이다.

 

사슴과 여우가 뛰노는 처녀림 속으로 살여울 맑은 물이 흘렀을 것이다. 지금도 흰 하늘이 고개라는 고개가 있지 아니하냐. 그 고개를 나서서야 비로소 흰 하늘을 바라보았다는 말이라고, 숭은 어려서 그 아버지에게 설명 받은 일이 있었다.

 

그것을 숭의 조상들이-아마 순의 조상들과 함께 개척한 것이다. 그 나무들을 다 찍어내고 나무뿌리를 파내고 살여울 물을 대느라고 보를 만들고, 그리고 그야말로 피와 땀을 섞어서 갈아놓은 것이다. 그 논에서 나는 쌀을 먹고, 숭의 조상과 순의 조상이 대대로 살고 즐기던 것이다. 순과 숭의 뼈나 살이나 피나 다 이 흙에서, 조상의 피땀을 섞은 이 흙에서 움 돋고 자라고 피어난 꽃이 아니냐.

 

그러나 이 논들은, 이제는 대부분이 숭이나 순의 집 것이 아니다. 무슨 회사, 무슨 은행, 무슨 조합, 무슨 농장으로 다 들어가고 말았다. 이제는 숭의 고향인 살여울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마치 뿌리를 끊긴 풀과 같이 되었다. 골안개 속에서 한가하게 평화롭게 울려오던 닭, 개, 짐승, 마소의 소리도 금년에 훨씬 줄었다. 수효만 준 것이 아니라, 그 소리에서는 한가함과 평화로움이 떠나갔다. 괴롭고 고달프고 원망스러웠다.

 

차가 가는 대로, 숭은 가고 오는 산과 들과 촌락을 바라보았다. 알을 밴 벼와, 누렇게 고개를 숙인 조와 피와, 머리를 풀어헤치고 피를 흘리는 용사와 같은 수수를 보았다. 새벽 물을 길어 이고 가는 여자들을 보았다. 아침 햇빛이 물 묻은 물동이를 비치어 금빛을 발하였다. 물동이를 인 여자는 한 손으로 물동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쳐내어버리고, 한 손으로는 짧은 적삼 밑으로 나오려는 젖을 가렸다.

 

기차가 우렁차게 달리는 소리를 듣고, 빨강댕이 아이들이 만세를 부르고 내달았다. 긴 장마를 겪은 초가집들은 마치 긴 여름 일을 치른 농부들 모양으로 기운이 빠져서 축 늘어졌다.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속이 썩은 모양으로 지붕의 이엉도 꺼멓게 썩었다. 그 집들 속에는 가난에 부대끼고, 벼룩 빈대에 부대끼고, 빚에 졸리고, 병에 졸리고, 희망을 빼앗긴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뭉개는 것이다.

 

정거장에를 왔다. 역장과 차장과 역부와 순사의 모자의 붉은 테와, 면장인 듯한 파나마 쓴 신사와, 서울로 가는 듯싶은 바스켓 든 여학생과, 그의 부모인 듯싶은 주름잡힌 내외와….

 

호각 소리가 나고 고동 소리가 나고….

 

큰 도회와 작은 정거장을 지나자, 숭은 차츰 배고픔을 깨달았다. 순이가 싸다 준 옥수수를 꺼내었다. 두 자루를 뜯어먹고는 좀 창피한 듯하여 도로 싸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