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선생의 이 박사와 윤명섭 소개가 끝나자, 일동은 이상하게 고요한 침묵 속에 있었다. 저마다,
"나도 한 가지 조선을 위해서 무슨 큰일을 해야겠다. 그리하자면 이씨나 윤씨와 같은, 또는 한 선생과 같은 극기, 헌신, 분투의 생활을 해야겠다."
하는 심히 단순한, 그러나 심한 감격 깊은 생각을 하였다.
"옳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고 허숭은 생각하였다.
"농민 속으로 가자.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몸만 가지고 가자. 가서 가장 가난한 농민이 먹는 것을 먹고, 가장 가난한 농민이 입는 것을 입고, 그리고 가장 가난한 농민이 사는 집에서 살면서, 가장 가난한 농민의 심부름을 하여주자. 편지도 대신 써주고, 주재소, 면소에도 대신 다녀주고, 그러면서 글도 가르치고 소비조합도 만들어주고, 뒷간, 부엌 소제도 하여주고, 이렇게 내 일생을 바치자."
이러한 평소의 결심을 한번 더 굳게 하였다. 대규모로 많은 돈을 얻어 가지고 여러 사람을 지휘하면서, 신문에 크게 선전을 하면서 빛나게 하자는 꿈을 버리기로 결심하였다.
"나부터 하자!"
하는 한 선생의 슬로건의 맛을 더욱 한번 깨달은 것같이 느꼈다.
대학에서 극 연구를 하는 김상철이나, 이전에서 음악을 배우는 심순례나, 다 저대로 조선사람의 생활을 돕기에 일생을 바치기 위하여 한번 더 결심을 굳게 하였다. 조선민중 예술-가장 가난한 조선 민중을 기쁘게 할 만한 소설과 극과 음악을 지어내는 것, 이것도 한 선생의 말에 의하건댄 큰일이요, 필요한 일이요, 새로운 조선을 짓는 데 각각 한 주추요 기둥이었다.
김갑진은 우선 명재판관이 되어 이름을 높이고 다음에 조선에 일등가는 변호사가 되어 돈도 많이 벌고 인권을 옹호하는 큰 인물이 되자는 것으로 자기의 천직을 삼는다고 하였다. 한 선생의 말에 의하면 그것도 조선에 필요한 일이라고 하였다.
무릇 조선과 조선사람을 생각하여 저를 희생하고 하는 일이면, 그리하고 그것을 동일한 이데올로기와 동일한 조직하에서 하는 일이면 다 좋은 일이라고 하였다. 더구나 부패하고 마비된 양반 계급에서 갑진과 같이 활기 있고 양심 있는 청년을 찾은 것을 한 선생은 기뻐하였다.
심순례의 마음은 차라리 윤명섭에게로 끌렸다. 만일 어느 편으로 끌린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러나 정서분의 마음은 단정적으로 이건영 박사에게로 끌렸다.
순례의 맘이 명섭에게로 끌린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대개 그의 아버지는 본래 가난한 집 유복자로서, 그 어머니조차 일찍 여의고 외가로 고모의 집으로 불쌍하게 자라나서 종로 어느 지물전에 사환으로 다니다가 점원이 되었다가 그가 삼십이나 되어서 월수로 돈을 좀 얻어가지고 독립하여 지물전을 내어서, 이래 근 이십 년간 신용과 근검과 저축으로 볏백이나 하고 남부럽지 않게 살게 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치부책에 치부를 할 만한 글밖에 몰랐다.
그는 술도 아니 먹고, 놀러도 아니 다니고, 재산이 생긴 뒤에도 첩도 아니 얻고(종로 상인은 열에 아홉은 중년에 돈이 생기면 첩을 얻는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꼭 가게와 안방을 세계로 삼고 왔다갔다할 뿐이었다.
순례의 어머니 역시 그 남편과 근검, 저축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하였다. 그의 동무들이 모두 금비녈세, 비취비녈세, 하부다일세, 굿일세, 물맞일세 하건마는, 그는 소화불량(그의 본 병이었다)이 심하기나 해야 악박골 약물에나, 그것도 다른 사람들 오기 전에 이른 새벽에 다녀올까, 그리고는 시흥 사는 친정에도 큰일이나 있기 전에는 가지 아니하였다. 오직 내외가 늦게 얻은 딸 순례 하나를 기르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을 뿐이었다.
그래서 순례는 여자보통학교, 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서 남들은 그만하면 시집을 보내라는 것도 물리치고 순례에게 음악 재주가 있다고 하여 이화전문학교의 음악과에 넣은 것이었다.
"내야 음악이 무엇인지 전문학교가 무엇인지 아오? 그저 재산 물려줄 것도 없으니깐두루 나중에 무슨 불행한 일이 있더라도 굶어 죽지나 말라고 자격이나 하나 얻어주려고 그러지요."
하는 것이 순례아버지의 순례 전문교육에 대한 의견이었다.
이러한 자립, 근검, 절제하는 가정에서 자라난 순례는 예술적 천품을 가지면서도, 마치 시골 농가에서 세상 모르고 귀히 자라난 처녀와 같이 모양낼 줄도 모르고 말숱도 없고, 천연스럽고 정숙스러웠다. 처음 보면 무언하고 유치한 것도 같지마는, 속에는 예술가의 예민한 감정이 있었다.
이러하기 때문에 순례는 호화로운 이 박사보다도 저와 같이 검소하고 겸손한, 어찌보면 못생긴 듯한 명섭이가 도리어 맘을 끈 것이었다.
순례는 아직 학교 선생 외에는(그것도 교실에서만) 일찍 남자와 교제해본 일이 없었다. 있었다면 전차 차창일까. 간혹 그의 뒤를 따르는 남자 학생들이 없음이 아니었지마는 그는 천연하게 본 체 만 체하였다. 그 남학생들은 얼마를 따라다니고 건드려보다가는 실망하고 달아나버렸다.
순례가 한 선생을 알게 된 것은 이화에 들어가서부터이었다. 순례는 이화에 들어가서 비로소 조선사람 남자선생을 대해보았다. 그 전에는 보통학교에서도, 늘 조선 남자선생 담임 밑에 있을 기회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