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되어 허숭은 졸업시험을 막 치르고 집으로-윤 참판 집으로 돌아왔다.

 

이 날은 웬일인지 윤 참판이 사랑방에 혼자서 앉아 있었다.

 

"댕겨왔습니다."

 

하는 허숭의 인사에 윤 참판은,

 

"이리 들어오게."

 

하고 친절하게 불렀다.

 

허숭은 들어가서 윤 참판의 앞에 읍하고 섰다. 윤 참판은 양실 사랑에 난로를 피워놓고 테이블 앞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거기 앉게."

 

하고 윤 참판은 턱으로 맞은편 교의를 가리켰다.

 

허숭은 앉았다.

 

"시험 다 치렀나"?

 

"네, 마지막 치르고 왔습니다."

 

"내가 오늘은 자네에게 할말이 있네."

 

하고 윤 참판은 턱수염을 한번 만졌다. 그 수염은 하얗다.

 

허숭은 다만 윤 참판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들을는지 모르겠네마는, 나는 오래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일이야. 인제는 자네도 졸업을 했으니 혼인도 해야 아니하겠나"?

 

하고 윤 참판은 허숭의 눈치를 보았다.

 

"아직 혼인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고 허숭은 분명히 말하였다.

 

"혼인할 생각이 없어? 왜"?

 

하고 윤 참판은 눈을 크게 떴다.

 

"공부도 더 하고 싶구요."

 

하고 허숭은 누구나 하는 말로 대답을 하였다. 직업도 없고 재산도 없이 어떻게 혼인을 하느냐고 말하기는 싫었다.

 

"공부는 또 무슨 공부를"?

 

하고 윤 참판은 물었다.

 

"이왕 법률을 배웠으니 변호사 자격이나 얻어두고 싶습니다."

 

"암, 그래야지."

 

하고 윤 참판은 뜻에 맞는다는 듯이,

 

"변호사가 되려면 고등문관 시험을 치러야 한다지"?

 

"네."

 

"갑진이도 금년에 고등문관 시험을 치르러 간다니까 자네도 같이 가 치르지. 칠월이라지"?

 

"네."

 

"그럼, 유월쯤 해서 동경으로 가지."

 

허숭은 동경 갈 노자가 없다는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동경에 가서 시험을 치르고 오자면 안팎 노자 쓰고 적어도 이백 원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윤 참판을 보고 그 돈을 달라고 할 명목은 아무것도 없었다.

 

허숭이 대답을 못하고 앉았는 뜻을 윤 참판도 짐작하였다. 그래서 허숭을 괴로운 생각에서 건져주려는 듯이,

 

"그럼 동경은 가기로 하고…"

 

하고 잠깐 머물렀다가,

 

"그런데 내가 자네보고 하자는 말은 그것이 아니고, 또 하나 중대한 말일세. 내 딸자식 말야, 정선이 말일세. 그거 변변치는 않지마는 자네 혼인해주지 못하겠나. 나도 인선이 죽은 뒤로는 도무지 의탁할 곳이 없고, 또 자네가 두고 보니까 요새 젊은 사람들 같지는 아니해. 그래서 내가 오래 두고 생각했어. 내 자식을 내가 말하는 것도 무엇하지마는 그리 몹쓸 자식은 아니구, 또 자네를 보고 직접 말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지마는 어디 말할 데가 있나. 그러니까 자네도 어떻게 알지 말게."

 

하였다.

 

이 말은 허숭에게 있어서는 과연 청천에 벽력이었다. 일찍 이런 일은 몽상도 아니한 일이었다.

 

허숭은 기실 어떻게 대답해야 옳을지를 몰랐다. 다만 저도 모르게,

 

"변호사 자격을 얻기까지는 혼인 문제를 생각하지 아니하겠습니다."

 

하고 물러나왔다.

 

윤 참판은 이 날 아침에 그가 가장 존경하는 재종형 윤 한은 선생을 찾아갔다. 가서 정선의 혼인 문제를 말하고 허숭이가 사위로 어떠냐 하고 뜻을 물었다. 한은 선생은 깜짝 놀라며,

 

"자네, 어찌 그 사람과 혼인을 할 생각이 났나"?

 

하고 물었다.

 

"두고 보니까 사람이 진실하고, 문벌은 없지마는 양반다운 점이 보이더군요."

 

하고 윤 참판은 자기의 지인지감을 자랑하였다.

 

"허게, 해!"

 

하고 한은 선생은 당장에 찬성하였다. 기실 한은 선생은 자기의 손녀 은경(恩卿)과 허숭과 혼인할까 하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었다. 한은 선생의 손녀 은경은 지금 동경 성심여학원에서 영문학을 배우고 있는 이였다.

 

이렇게 한은 선생의 찬성을 얻은 윤 참판은 집에 돌아오는 길로 딸 정선을 불러 허숭에 대한 의향을 물었다. 정선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실상 정선은 일찍 허숭에게 대해서 깊이 생각해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다만 자기를 허숭 같은 시골사람에게 주려는가 하는 아버지의 뜻을 알 수 없다 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윤 참판은 딸의 말 없음을 이의 없는 것으로만 해석하였고, 그뿐더러 딸이 혼인에 대하여 가부를 말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 혼인은 되는 것으로 혼자 작정한 것이었다. 허숭이가 윤 참판의 청혼에 거절할 리가 있느냐고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