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 안 그런가."

 

하고 숭은,

 

"자네는 가치비판의 표준을 전도한단 말일세. 중하게 여길 것을 경하게 여기고 경하게 여길 것을 중하게 여긴단 말야. 조선하면 농민 대중이 전 인구의 팔십 퍼센트가 아닌가. 또 사람의 생활자료 중에 먹는 것이 제일이 아닌가. 그 다음은 입는 것이요-하고 보면, 저 농민들로 말하면 조선민족의 뿌리요 몸뚱이가 아닌가. 지식 계급이라든지 상공 계급은 결국 민족의 지엽이란 말일세. 그야 필요성에 있어서야 지엽도 필요하지, 근간 없는 나무가 살지 못한다면 지엽 없는 나무도 살지 못할 것이지.

 

그렇지마는 말일세, 그 소중한 정도에 있어서는 지엽보다 근간이 더하지 않겠나. 그러하건마는 조선 치자계급은 예로부터-그 예라는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말할 것 없지만-지엽을 숭상하고 근간을 잊어버렸단 말일세.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고래로 조선의 치자계급이던 양반계급이 말야, 그 양반계급이 오직 자기네 계급의 존재만을 알았거든. 자기네 계급-그것이야 전 민족의 한 퍼센트가 될락말락한 소수면서도-자기네 계급이 잘 살기에만 몰두하였거든.

 

그게야 어느 나라 특권 계급이나 다 그러했겠지마는, 조선의 양반계급이 가장 심하였던 것이 사실이 아닌가. 그래서는 국가의 수입을 민중의 교육이라든지, 산업의 발달이라든지 하는 전 국가적 민족적 백년 대계에는 쓰지 아니하고, 순전히 양반계급의 생활비요 향락비인-이를테면 요새 말로 인건비에만 썼더란 말일세.

 

그 결과가 어찌 되었는고 하면 자네도 아다시피, 전 민족은 경제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지식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모든 방면으로 다 쇠퇴하여져서 마침내는 국가 생활에 파탄이 생기게 하고, 그리고는 그 결과가 말야, 극소수, 양반 중에도 극히 권력 있던 몇십 명, 백명은 넘을까 하는 몇 새 양반계급을 남겨 놓고는 다 몰락해 버리지 않았느냐 말야."

 

"어느 서양 사람이 조선을 시찰하고 비평한 말을 어디서 보았네마는, 그 사람의 말이, 나무 없는 산, 물 마른 하천, 좋지 못한 도로, 양의 우리 같은 백성들의 집, 어리석고 쇠약한 사람들, 조선에서 눈에 띄우는 것이 모두 다 실정(失政=maladministration)의 자취라고."

 

"이 사람의 말에 자네 반대할 용기가 있나. 조선의 모든 쇠퇴가 정치를 잘못한 자취라는 말을? 그것이 다 양반계급의 계급적 이기욕과 가치판단의 전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데 말야. 아냐, 내 말을 끝까지 자세히 듣게. 그런데말야, 자네와 같은 지식 계급이 아직도 그러한 전도된 가치판단을 한다는 것은 심히 슬픈 일이 아닌가. 우리네 새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여러 백년 동안 잊어버렸던, 아니, 잊어버렸다는 것보다도 옳지 못하게 학대하던 농민과 노동 대중의 은혜와 가치를 깊이 인식해서 그네들에게 가서 봉사할 결심을 가지는 게 옳지 아니하겠나"?

 

숭은 말을 끊었다.

 

두 사람이 부산 부두에 내린 때에는 여름의 긴 날도 저물었다. 낮에 날이 좋던 모양으로 밤도 좋았다. 바다로 불어오는 바람은 온종일 차 중에서 부대끼던 허숭, 김갑진 두 사람에게는 소생하는 듯한 상쾌함을 주었다. 더구나 오륙도 위에 달린 여름의 보름달은 상쾌 그 물건이었다.

 

두 사람은 짐을 들고 연락선으로 향하였다. 정거장에서 부두까지에는 일본으로 향하는 노동자가 떼를 지어 오락가락하였다.

 

머리를 깎은 이, 상투 있는 이, 갓쓴 이조차 있었고, 부인들도 여기저기 보였다. 그 중에는 방직 여공으로 가는 듯한 처녀들도 몇 떼가 있었다.

 

고무신을 신은 이, 게다를 신은 이, 운동 구두를 신은 이, 잘 맞지도 않고 입을 줄도 모르는 시마 유까다(일본 여름옷)를 입은 이, 도무지 형형색색이었다.

 

말씨도 대개는 경상도 사투리지마는, 길게 가냘프게 뽑는 호남 말도 들리고, 함경도 말, 평안도 말도 들리고, 이따금은 단어의 첫 음절과 센텐스의 끝 음절을 번쩍번쩍 드는 경기도 시골 사투리도 들렸다. 각 지방에서 모여든 모양이다.

 

쓰메에리, 무르팍 양복을 입고 왼편 팔에 붉은 헝겊을 두른 사람들이 위압적 태도와 언사로 군중을 지휘하는 것은 이른바 노동귀족인 패장인가 하였다.

 

배에 오를 때에는 보통 여객과 노동자와는 특별한 취급을 받는 모양이었다. 사다리 밑에 좌우로 늘어선 사복 형사는 용하게도 조선사람을 알아내어서는 붙들고 여행증명서를 검사하였다. 허숭도 김갑진도 증명서를 내어보였다.

 

"여행권 검사요"?

 

하고 갑진은 불쾌한 듯이 경관에게 물었다.

 

"여행권이 아니야, 증명서야, 신분증명서야."

 

하고 형사는 굳세게 여행권이라는 말을 부인하였다. 그리고 갑진을 눈을 흘겨보았다.

 

"어서 가세."

 

하고 허숭은 또 갑진이가 무슨 말썽을 부리지나 아니할까 하여 소매를 끌었다.

 

갑진은 형사에게 대꾸로 한번 눈을 흘기고 허숭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