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허숭에게는 이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아니하였다. 왜 그런고 하면 허숭에게는 두 가지 의리가 있었으니, 그것은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을 얻으면 농촌에 돌아가 농민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다는 것과, 또 하나는 유순에게 대하여 그의 어깨를 안고 머리를 만지며,
"내 또 올께."
한 약속이었다. 이 약속은 물론 약혼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 허숭은 속으로,
"이 여자와 일생을 같이하자."
하고 생각도 하였거니와, 적어도 유순은-꾸밈도 없고 옛날 조선식 여성의 맘을 가진 유순은, 허숭의 가슴에 제 이마를 대었다는 것이,
"나는 이 몸을 당신께 바칩니다. 일생에, 죽기까지 나는 당신의 사람입니다. 나는 이것으로써 맹세를 삼습니다. 내 맹세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는 것을 표한 것이었고, 이러한 조선식 신의 관념을 가진 유순으로는, 반드시 자기는 허숭의 처가 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매 허숭은, 자기는 이미 혼인한 사람과 같은 책임감을 아니 가질 수 없었다.
또 한 가지 이유, 즉 농촌으로 가자는 이유도 정선과의 혼인을 불가능케 하는 것이었다. 서울서 여러 백년 동안 흙이라고 만져본 일도 없는 정선이 농촌으로 들어가기는 불가능보다 더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래서 허숭은 단연히 윤 참판의 통혼을 거절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다시 윤 참판이 말하거든 자기는 단연히 거절하리라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윤 참판은 허숭은 벌써 자기의 사위가 된 것으로 자신하고 있었다. 그러하기 때문에 다시 허숭에게 말도 하지 아니하였다.
유월 어느 날, 허숭은 김갑진과 함께 동경역을 향하여 경성역을 떠났다. 허숭은 윤 참판이 해입으라는 양복도 거절하고 학교시대 옷을 그냥 입고 새 맥고모자 하나를 사 쓰고 윤 참판이 주는 가방 하나를 들고 길을 떠났다. 김갑진은 세비로에, 스프링 코트를 입은 훌륭한 신사였다. 역두에는 두 사람의 동창생들의 정성스럽고도 유쾌한 전송이 있었다.
날은 맑고 더우나 차창으로는 서늘한 바람이 들어왔다. 차가 차차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모내는 일이 바쁜 듯하였다. 어제, 그저께 이틀 연해서 온 비가 넉넉지는 못해도 모를 낼 만하게는 논에 물이 닿았다. 해마다 모낼 때에는 가문다, 죽는다는 소리가 난다. 그러나 사흘만 더 가물면 죽겠다 할 만한 때에는 대개는 비가 오는 법이다. 금년에도 그러하였다. 마치 하느님이 나는 나 할일을 다 한다, 너희들만 너 할일을 하여라, 하는 것 같았다. 내가 없는 줄 알지 말아라, 나는 있다, 너희가 하느님이 없나보다 할 만한 기회에 내가 있다는 것을 보인다, 하는 것 같다.
허숭은 나불나불 바람에 나부끼는 모를 보고, 허리를 굽히고 모를 심는 농부들을 볼 때에, 하늘에 찬 볕과 땅에 찬 생명이 모두 그들을 위하여 있는 것 같았다. 사람이 하는 모든 일 중에 오직 농사하는 일만이 옳고 거룩하고 참된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 차에 올라앉은 사람들은 다 저 농부들의 땀으로 살아 가는, 그러면서도 저 농부들의 공로를 모르고, 그들에게 감사할 줄을 모르는 사람들같이 보였다.
"자네 무얼 그리 내다보고 앉았나."
하고 김갑진은 어디로 돌아다니다가 자리에 돌아와서 허숭의 무릎을 탁 친다. 그리고 허숭이가 바라보는 곳을 바라본다. 갑진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저 모내는 것을 보고 있네."
하고 숭은 갑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건 무엇하러"?
하고 갑진은 한번 더 허숭이가 바라보던 곳을 내다보았으나, 이 때에는 벌써 열차는 벌판을 다 건너와서 어떤 산찍은 틈바구니를 달리고 있었다.
"자네네 조상이 대대로 해 오던 짓이니까 그리운가 보네그려. 그러니까 개꼬리 삼년이란 말이거든."
하고 또 빈정대기를 시작했다.
"자네 눈에는 농사가 그렇게 천해 보이나"?
하고 숭은 약간 감상적이었다.
"그럼, 요새 상공업 시대에 농사라는 게야 인종지말이 하는 게지 무에야. 다른 건 아무것도 해먹을 노릇이 없으니까 지렁이 모양으로 땅을 파는 게 아닌가. 이를테면 자네 같은 사람은 똥 개천에서 용이 오른 셈이고, 하하. 지렁이 속에서 용이 올랐다는 게 더 적절할까, 하하."
갑진은 차바퀴 굴러가는 소리보다도 더 큰 소리로 떠들었다. 곁에 앉은 사람들도 갑진의 말을 듣고 빙긋빙긋 웃었다. 그래도 갑진의 천진난만한 태도엔 악의나 미운 생각이 섞이지 아니하였다.
"자네 그게 진정인가"?
하고 허숭은 엄숙하게,
"그렇게도 농사와 농민을 이해하지 못하나? 자네 눈에는 그처럼 농민이 버러지같이 보이나? 만일 진실로 그렇다면 참말로 큰 인식 착오일세."
"어럽시오. 이건 또 훈계를 하는 심이야. 흥, 농자는 천하지 대본야라, 그것을 설법을 하는 심야. 아따 이놈아, 집어치워라. 우리 집에도 시골 마름놈들이 오지마는, 그놈들 모두 음흉하고 돼지 같고 어디 사람놈들 같은 것 있더냐. 시골 구석에서 땅이나 파먹는 놈들이 순실키나 해야 할 텐데, 도무지 그놈들 서울사람 한번 못 속여먹으면 삼년 동안 복통을 한다더라. 그저 그런 놈들은 꾹꾹 눌러야 해. 조금만 늦구면 버릇이 없어지거든. 안 그러냐, 이놈아. 너는 인제는 전문학교깨나 졸업을 했으니 좀 시골놈 껍질을 벗어보아. 괜히시리 없는 가치를 붙이려고 말고…머 어째? 네가 농촌에 들어가서 농민들과 같이 살 테야? 그럴 테면 공부는 무얼하러 해? 허기는 그렇기도 하겠다, 고등문관 시험에 낙제나 하는 날이면 그밖에는 도리가 없겠지,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