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 떠났다.

 

미스 홀은 조그마한 가방 하나를 들고 빈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정선은 마주 가서 홀 부인의 가방을 받았다.

 

"아, 정선이!"

 

하고 홀 부인은 반가운 듯이 정선의 손을 잡고 어깨를 만졌다.

 

이 박사는 홀 부인을 몰랐기 때문에 두어 자리 건너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

 

하고 홀 부인의 등 뒤에서 정선의 어깨를 치는 사람이 있었다.

 

"아이, 순례야."

 

하고 정선은 어깨를 치는 손을 잡았다.

 

"언니, 어디 가우"?

 

하고 순례는 반가움을 못 이기어 하는 듯이 정선에게 매어달렸다.

 

순례라는 말에 이 박사는 얼굴에 피가 모이었다. 순례의 얼굴이 눈에 번쩍 나타나자 이 박사는 바깥을 바라보는 것처럼 창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미스 최도 이 박사의 당황한 양이 눈에 띄었다.

 

"이리 오세요. 여기 자리 있어요."

 

하고 정선은 순례의 눈에 이 박사가 보이지 아니하도록 순례를 한편 옆에 끼고 제 자리로 걸어가려 하였다.

 

그러나 순례의 눈에는 이 박사의 뒷모양이 눈에 띄었다. 그것만으로도 이것이 이건영인 줄을 알기에 넉넉하였다.

 

순례의 발은 땅에 붙었다. 순례의 눈에는 유리창에 비친 이건영의 얼굴이 보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례를 실컷 희롱하고 돈이 없다고 박차버린 이건영이다. 순례의 가슴에 일생 가도, 삼생을 가도, 미래 억만생을 가도 고쳐질 수 없는 아프고 쓰리고 아린 생채기를 내어 놓고 달아난 이건영이다. 슬픔을 모르는 순례에게 피가 마르는 슬픔을 박아 준 이 박사다. 사람은 다 천사로 알던 순례에게 사내는 모두 짐승이요 악마라는 쓰디 쓴 생각을 집어 넣고 달아난 이 박사다. 순례는 이 박사가 그동안 이 여자 저 여자, 살맛과 입술맛을 보며 돌아다닌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러한 이건영 박사를 오늘 여기서 만날 줄이야.

 

순례는 그 일이 있음으로부터 도무지 밖에를 나오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이 박사를 만날까 두려워함이었다. 도무지 이건영 박사를 만나는 것이 무서웠다. 맘 한편 구석에는 이 박사를 그리워하는 생각이 있으면서도 이 박사를, 그 얼굴을, 그 눈을, 그 입술을 자기의 몸을 두루 만지던 그 손을 보기가 무서웠다.

 

그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자기는 귀신을 만난 것과 같이, 맹수를 만난 것과 같이 기색해버릴 것 같았다. 그렇지 아니하면 자기가 정신을 잃어버리고 미친 사람이 되어서 이건영의 모양낸 양복을 찢고 빨간 넥타이로 목을 매어 죽이든지, 그 말 잘하는 거짓말, 유혹하는 말 잘하는 혓바닥을 물어 끊어버리든지, 그 여러 여자의 입술을 빨기에 빛이 검푸러진 입술을 아작아작 씹어버리든지, 그 여러 처녀의 살을 맘대로 만지던 손을 톱으로 잘라버리든지 결딴을 내고야 말 것 같았다.

 

정선은 순례를 안다시피 하여서 자리에 끌어다가 앉히고는,

 

"글쎄, 그 사람은 왜 보니. 그까짓 건 잊어버리고 말자, 또 미스 최라나 한 여자를 후려 데리고 가는구나. 일본 유학생이래. ○○여학교에 교사로 간다는데 귀축축하게 따라 가는걸."

 

하고는 해쑥해지는 순례의 낯을 본다.

 

순례는 본래 연약한 여자는 아니지마는 이건영 박사를 생각하면 곧 빈혈을 일으키고 기절할 듯하였다. 오늘도 뜻을 굳이 먹고 참았으나 눈앞이 노랗게 됨을 깨달았다. 순례는 정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조는 듯이 눈을 감았다.

 

이것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억제하는 도리였었다. 홀 부인은 순례의 맞은편에 말없이 앉아서 한참이나 기도를 올리는 모양이었다.

 

홀 부인은 이화에 있는 동안, 순례를 딸같이 사랑하였다. 그는 순례를 부를 때에 사실상 딸이라고 불렀다. 그는 순례가 조선 처녀답게 순진하고, 말없고, 무겁고, 그리고도 지혜가 밝고, 감정이 예민한 것을 사랑하였다. 순례가 이건영 박사에게 농락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홀 부인은 한 선생을 찾아가서 크게 항의를 하였다. 순례는 이 박사와의 혼인에 대한 말을 일체 아무에게도 홀 부인에게도 알리지 아니하였던 것이었다.

 

"정선, 그 사람 닥터 리요"?

 

하고 홀 부인은 비로소 입을 열어서 정선에게 물었다.

 

"네."

 

하고 정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홀 부인은 몸을 기울여서 이 박사가 앉은 곳을 흘겨보았다. 그리고 치미는 감정을 억제하는 듯이 두 손을 깍지를 껴서 틀었다. 입 속으로 무슨 말을 중얼거렸다.

 

한참이나 세 사람은 말이 없었다.

 

"나 이 박사 그저 둘 수 없소. 말 한번 해야겠소."

 

하고 홀 부인은 모자를 벗어놓고 일어났다.

 

홀 부인은 이 박사의 곁으로 걸어갔다.

 

"이 박사시요"?

 

하고 말을 붙였다.

 

이 박사는 벌떡 일어났다.

 

"나 미스 홀이요."

 

하고 홀 부인은 미스 최에게 대하여 잠깐 목례하고 그 곁에 앉았다. 이 박사는 악수를 기다리고 손을 내밀었으나 홀 부인은 손을 내밀지 아니하였다.

 

"이 박사, 심순례 사랑한 일 있습니까"?

 

하는 홀 부인의 어성은 칼날 같았다.

 

"네, 잠시, 저, 어떤 사람의 소개로 교제한 일 있지요."

 

하고 이 박사는 좀 당황하였다. 상대편인 심순례가 지척에 지키고 있으니 이 박사의 웅변도 나올 예기를 꺾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