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은 이 박사가 어디서 내렸느냐 하는 말도 묻지 아니하였다. 아마 미스 최에게 물리침을 받고 평양에서 내려서 또 어떤 부자집 딸을 고르기로 작정하였으리라고 생각하였다. 혹은 순례의 뒤를 따른 것이나 아닌가 하였다.

 

"실례 말씀이지마는 이 박사 주의하세요. 못 믿을 남자입니다."

 

하고 손을 흔들었다.

 

미스 최의 눈에서는 새로운 눈물이 쏟아짐을 정선은 보았다.

 

정거장에는 살여울 동네 사람 하나가 나와서 등대하고 있었다. 정선이가 어제 아침에 허숭에게 전보를 쳐놓았던 까닭이다. 그 동네 사람은 이등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바라고 섰다가 마주 와서,

 

"서울서 오시는 윤정선 씨시우"?

 

하고 물었다.

 

그렇다는 대답을 듣고, 그 사람은 정선의 짐과 곽 박사의 짐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정거장 밖으로 앞서서 나왔다. 밖에는 동네 사람이 이삼 인이나 나와 있었다. 그들은 다 이번 황기수 사건에 잡혀갔다가 일심에 무죄판결을 받고 나온 사람들이었다. 주범 맹한갑만 삼 개월 징역의 언도를 받아 공소하고, 다른 일곱 사람은, 혹은 무죄로, 혹은 집행유예로 다 나왔다. 그들은 이것이 다 허 변호사의 덕이라 하여 나온 뒤에는 숭의 집 일을 제 일같이 보았다.

 

그들은 정선과 곽 박사의 묻는 말에 대하여 허숭의 병이 중하지마는 그리 위험치는 아니하다고 하였다.

 

무너미 고개에는 남녀 군중이 삼사십 명이나 마중을 나와 있었다. 이번 재판이 있은 후로, 사람들이 무사히 나온 후로 동네 사람들의 숭에게 대한 존경이 갑자기 더하였다. 더구나 숭이 제 일가 사람들도 아랑곳 아니하는 동네 사람들의 염병을 구완하다가 병이 든 것을 보고는 동정이 심히 깊었다. 그들은 (그 중에 돈푼이나 지니고 사는 거만한 몇집을 빼고는) 하루에 한두 번씩 숭의 집에 문병을 가고, 숭은 정신을 잘 못 차리지마는 양식과 나무와 일습을 대었다.

 

정선은 이렇게 동네 사람들이 많이 마중을 나온 것에 놀랐다. 구경을 나온 것이 아닌가고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는 마치 오래 멀리 가 있던 친족이나 만나는 듯이 반가와하는 빛이 보였다.

 

동네 사람들은 처음에는 서먹서먹하여 마치 외국사람이나 대하는 듯이, 내외나 하는 듯이 말도 잘 붙여보지 못하였으나 정선이가 차차 한마디 두마디 말대답하는 것을 보고는 친해져서,

 

"차에서 잠을 못 자서 곤하겠군."

 

하고 반말을 하는 아주머니조차 나서게 되었다.

 

정선은 그러한 동안에도 눈을 돌려서 유순이라는 계집애가 어디 있나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럼직한 아이는 없었다.

 

"자, 어서 가보아야지. 이러구 있으면 되나."

 

하는 어떤 노인의 재촉으로 정선을 에워싼 진이 풀리고, 정선은 동네를 향하여 걸음 걷기를 시작하였다.

 

주재소에서 경관이 나와서 정선과 곽 박사를 붙들고 몇마디 물었다.

 

정선의 일행이 우물 앞에 다달았을 때에 유순이가 마주 나왔다.

 

유순은 앞선 곽 박사를 위하여 옛날식으로 길가에 돌아서서 길을 피하였다. 그리고는 몇걸음 더 걸어오다가 정선을 바라보고는 머뭇머뭇하다가 아무 말도 없이 정선에게 길을 피하였다.

 

"순아, 이 이가 허 변호사 댁이다."

 

하고 어떤 부인네가 유순에게 말하였다.

 

이 말에 정선은 기회를 얻어 발을 멈추고 돌아섰다.

 

정선은 손을 내밀어 유순의 손을 잡고,

 

"유순씨세요? 나 윤정선이야요. 편지 주신 거 고맙습니다."

 

하고 웃어보였다.

 

"유순입니다."

 

하고 유순은 학교에서 선생 앞에 하듯이 경례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