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를 본 정선은 지금까지 타던 질투와 불쾌의 불길이 다 스러지고 그의 속에 숨어 있던, 가리어 있던, 감추어 있던 깨끗한 혼, 사랑과 동정으로 된 혼이 깨었다. 아아, 그러면 남편은 역시 그가 늘 말하던 농촌사업을 위해서 달아났는가. 아아, 그러면 남편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가. 아아, 그러면 유순이라는 여자는 결코 남편을 유혹하는 요물은 아니던가.
"내가 잘못했소. 다 내가 잘못했소. 내 곧 가께요, 내 곧 가께요. 내 곧 가서 병구완할께요."
하고 정선은 오직 사랑에 넘치는 마음으로 저녁차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아, 차보다도 비행기로 갈까."
정선의 마음은 조급하였다.
정선이가 처음으로 할 일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아버지. 정선이야요. 네. 허 서방이 시골 가서 병이 중하다고 의사를 하나 데리고 저더러 오라고요. 네, 네. 저 저녁차에 갈 텐데 아버지 의사를 하나 구해 주세요. 네, 돈은 있어요. 그럼 아버지가 어떻게 가십니까. 네. 떠나기 전에 집에 갈 테야요."
이러한 전화다.
윤 참판은 일변 놀랐지마는 또 일변 기뻐하였다. 이혼을 염려하던 그는 숭의 부처간에 아직도 애정의 연결이 있는 것을 본 까닭이었다. 딸이 이혼하는 것-시집에서 쫓겨 오는 것을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과부가 되는 것이 나을 듯하였다.
그날 밤에 정선은 그 친정 동생들의 전송을 받으며 남대문 정거장에 섰다. 의사 곽 박사가 정선과 동행하기로 하였다. 곽 박사에게 여비를 준 것은 물론 윤 참판이었다. 윤 참판은 간호부 하나까지 얻어서 뒤따라 정거장으로 내어보냈다.
이리하여 정선의 일행은 세 사람이었다.
봉천으로 가는 차. 오후 열시 사십분.
차는 떠났다. 정선은 승강대에서 동생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전송 나온 사람들이 아니 보이게 될 때까지 서 있었다.
정선은 이 가을밤에는 너무도 선선해 보이는, 살이 비치는 은조사 적삼에 둥근 남 무늬 있는 보이루 치마를 입고 구두만은 검은 칠피를 신었다. 머리는 가마 있는 데 약간 속을 넣어 불룩하게 하고 쪽이 있는 듯 없는 듯하게 틀었다. 그리고 금테 안경을 썼다.
그는 아직 여학생 같았고 남의 부인 같지를 아니하였다. 전기불빛에 보는 그의 살빛은 마치 호박으로 깎은 듯하였다. 엷은 옷을 통하여 살까지도 뼈까지도 투명한 듯하였다. 그의 짧은 회색 치마폭이 살빛 같은 스타킹에 씌운 길쭉한 두 다리를 펄렁펄렁 희롱하였다.
별로 집을 떠나본 일이 없는 정선은 이렇게 차를 타고 나서는 것이 큰일 같았다. 더구나 경의선이라고는 개성까지 밖에는 못 와본 정선이다. 알지 못하는 나라로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 뿐인가, 앓는 남편을 찾아가는 길이다.
정선이가 자리에 돌아오는 길에,
"아, 미세스 허!"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디 가십니까"?
하고 손을 내미는 사람은 천만뜻밖에도 이건영 박사였다. 정선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면서 이 박사에게 손을 주었다.
이 박사는 정선의 손을 흔들며,
"미세스 허. 미스 최, 소개합니다. 최영자씨신데 내량여자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시고 이번 ○○여자고등보통학교에 부임하시게 되었습니다."
하고 이 박사는 고개를 기울여 미스 최영자라는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애정을 보이려 함인 듯하였다.
"최영자올시다."
하고 미스 최라는 이는 일본식으로 읍하고 허리를 약간 굽혔다.
"네, 저는 윤정선이야요."
하고 정선은 서양식으로 잠깐 고개를 숙였다.
"이 어른은 변호사 허숭씨 영부인, 이화의 천재시요, 미인이시죠."
하고 이건영 박사는 얼굴 근육을 씰룩하였다.
정선은 이것들은 또 언제부터 만났나 하고 두어 번 두 사람을 보았다. 이건영 박사는 심순례를 차버린 후에도 같은 학교의 여자를 둘이나 한꺼번에 희롱하였다. 그러다가 인제는 이화에서는 완전히 신용과 명성을 잃어버리고 일본 갔던 여학생들을 따라다닌다는 소문을 정선도 들었다.
미스 최도 그 중의 하나로 아마 이번에 한 차를 타고 유혹을 하는 모양이로구나 하였다.
"그런데 혼자 가시는 길입니까"?
하고 이건영 박사는 정선에게 자리를 내어 주며 물었다.
"네, 의사 한분하고 같이 갑니다."
"의사!"
하고 이건영은 얼른 남편을 잃은 정선과 어떤 의사와의 사랑, 달아남을 연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