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과 한갑 어머니가 이 소리에 뛰어나와서 떨고 섰다.
숭의 억센 주먹심과 위엄에 이 의사는 벌벌 떨기만 하고 더 말이 없이 구두끈도 아니 매고 가방을 들고 나가버렸다. 대문 밖에 나가서야, 이 의사는,
"어디 이놈들 견디어보아라."
하고 중얼거렸다.
숭은 이 의사가 나가버리는 것을 보고 들어와 유 초시를 안아 뉘었다. 유 초시는 마치 죽은 지가 오랜 시체와 같이 몸이 굳었다.
순은 유 초시의 머리맡에 꿇어앉아서,
"아버지, 아버지."
부르며 울었다.
의사가 나간 지 한 시간이 못 되어서 경관 두 사람이 유 초시의 가택을 수색하였다. 그래서 항아리에 남은 술을 압수하고 유 초시와 그 누이가 둘이 다 장질부사라 하여 대문에,
<이 집에 장질부사 환자 있으니 교통을 엄금함>
하는 나무패를 갖다가 붙이고 숭이를 대하여서는,
"당신은 왜 여기 와 있소"?
하고 물러가기를 청하였다.
"내가 없으면 병 간호할 사람이 없소."
하고 또 예방주사를 맞은 것을 말하여 숭은 이 집에 출입하는 양해를 얻었다.
이날 밤이라는 것보다도 이튿날 새벽에 유 초시는 고만 세상을 떠나버렸다. 그는 죽기 얼마 전에 한번 정신을 차려서 허숭을 바라보고,
"숭이, 내가 죽거든 이 애는 자네가 맡아서 시집을 보내 주게."
하고 또 순을 보고,
"내가 죽거든 숭이를 네 친오라범으로 알고 믿고 살아라. 그리고 숭이가 골라 주는 사람한테 시집을 가거라."
하고 유언 비슷한 것을 말하였다.
유 초시는 끝끝내 그 아들을 믿지 아니하였다. 그가 감옥에서 나온다 하더라도 믿을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였다. 유 초시 죽으면 유가 하나가 망해버리는 것만 같아서 퍽 맘이 슬펐다. 그것이 자기의 불효인 것 같았다. 그렇지마는 그는 이러한 슬픔을 낯색에 나타내는 것이 옳지 아니하게 알기 때문에 괴로움이나 슬픔이나 모두 삼켜버린다.
이렇게 유 초시는 아들, 며느리, 어린 손녀, 다 보지 못하고 딸과 숭의 간호를 받으며 마지막 숨을 쉬었다.
유 초시가 죽은 지 나흘, 장례가 나갈 날에 순의 고모는 치마끈으로 목을 매어서 죽어버렸다.
며느리는 머리를 풀고 삿갓가마를 타고 왔었으나 장례를 치르고는 도로 친정으로 가버렸다. 젖먹이를 두고 왔다는 핑계였다.
숭은 이 모든 일을 혼자서 다 치렀다.
물론 장례 비용도 숭이 대었다. 장례가 끝남에 이 집은 채권자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유 초시의 집은 아주 망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유초시의 아들 정근(正根)은 가독상속인이니, 그 사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는 남은 재산(재산이래야 세간)을 처리할 방도가 없었다. 마침 황기수 구타사건의 공판 기일이 임박했으니 숭이가 변호하러 가는 길에 정근을 면회하고 법적수속을 하기로 하고, 우선 한갑 어머니로 하여금 순을 데리고 새로 지은 집 건넌방에 거처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숭은 곧 ○○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