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은 살여울 동네에 온 뒤로 이틀 밤을 새웠다. 밤에는 물것일래, 낮에는 파릴래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또 있는 동안에 이 동네에 관하여 이러한 지식을 얻었다.
장질부사 앓는 이가 셋, 이질 앓는 이가 넷, 학질 앓는 이가 다섯, 무슨 병인지 알지 못하고 앓는 이가 둘, 만삭이 되어서 배가 아픈 부인이 하나. 만일 의사를 대어 진찰을 한다면 이 동네에 완전한 건강을 가진 이가 몇이나 될까. 비록 큰 병이 안 들린 사람이라 하더라도 혹은 기생충, 혹은 영양불량에서 오는 모든 병, 낯빛을 보면 건강해 보이는 이는 몇이 아니 보인다.
숭은 이틀 밤을 이 동네에서 지내어도 정신이 하나도 없고 몸은 죽도록 앓고 난 사람과 같다. 못 먹고, 과로하고, 잠 못 자고, 심려하고, 그리고도 용하게 이만한 건강을 부지해 왔다. 참말 목숨이란 모질구나 하고, 한탄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질이나 장질부사 환자의 똥에 앉았던 파리들은, 그 발에 수 없는 균을 묻혀 가지고 부엌으로 아우성을 치고 돌아다니며 음식과 기명과 자는 아이네의 입과 손에 발라 놓는다. 밤이 되면 학질의 스피로헤타를 배껏 담은 모기가 분주히 이 사람 저 사람 혈관에 주사를 하고, 발진티푸스 균을 꼴깍꼴깍 토하는 이와 빈대는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여행을 다닌다.
농촌에 의사가 있느냐. 가난한 농촌의 병은 현대의 의사에게는 학위 논문 재료로 밖에는 아무 흥미가 없는 것이다. 그 병을 고친대야 돈이 나오지 아니한다. 농촌에서 도시에 있는 의사 하나를 데려오자면 오막살이를 다 팔아 넣어야 하지 않는가. 자동차빕시요, 출장빕시요, 진찰룝시요, 약값입시요, 이렇게 돈 많이 드는 의사를 청해다 보느니보다는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 편안한 일이다.
그렇다고 의사도 현대에는 병 고치는 것은 수단이요 돈벌이가 목적이어든, 돈 안 생기는 농촌 환자를 따라다니라는 것은 실없는 소리다. 국비로 하는 위생 설비조차, 위생경찰조차 도시에 하고 남은 여가에나 농촌에 세우는 이때여든. 만일 도시의 수도에 들이는 경비를 농촌의 우물 개량에 들인다 하면 몇천 동네의 음료를 위생화할는지 모르지 않느냐.
이리해서 농촌 사람은 병 많고, 일찍 늙고, 사망률 높고, 어린애 사망률이 더욱 높고, 그들의 일생에 땀을 흘려서 모든 사람의 양식과 문화의 건설 비용을 대면서도, 자기네는 굶고 자기네는 문화의 혜택을 못 보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할 때에 숭은 일종의 비분을 깨달았다.
"옳다. 그래서 내가 농촌으로 오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숭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디 해보자. 내 힘으로 살여울 동네를 얼마나 잘 살게 할 수 있는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계급투쟁 이론의 가부는 차치하고 어디 건설적으로, 현 사회조직을 그대로 두고, 얼마나 나아지나 해보자-이것은 내가 동네 사람들로 더불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냐. 장래의 천국을 약속하는 것보다 당장 죽을 농민을 살릴 도리, 아주 살릴 수는 없다 치더라도, 그 고통을 감하고 이익을 증진할 도리-이것은 내 자유가 아니냐"
이렇게 숭은 생각하였다. 그리고 숭은 일종의 자신과 자존과 만족을 깨달았다.
"내 일생을 바치어 살여울 백여 호 오백 명 동포를 도와보자!"
이렇게 결심하고 숭은 일할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맨 처음 할 일이 무엇일까. 이 동네 사람들의 고통 중에 어느 것을 먼저 들어주어야 할까. 그리하고 어떠한 방법, 어떠한 경로로 매 호에 논 닷 마지기, 밭 하루갈이를 줄 수가 있을까, 그리고 숭이 자신은 어떠한 생활을 해야 될까.
첫째로 할 일은 읍내에 가서 의사를 데려오는 것이었다. 둘째로 할 일은 양식 없는 이에게 양식을 줄 도리를 하는 것이었다. 세째로 할 일은 파리와 모기와 빈대를 없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네째로는 잡혀 간 사람들-한갑이 아울러 여덟 사람을 나오게 하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일은 우선 금명간에 하지 아니하면 아니될 일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