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파랗게 맑고 별이 총총하다. 가을이 멀지 아니한 표다. 시루봉 먹고개 흰 하늘이, 고개등 독장산 줄기 산들이 푸른 하늘 면에 검은 곡선을 그었다. 숭은 발이 가는 대로 집 없는 벌판을 향하고 걸어 나갔다. 고요하다. 아직 벌레 소리가 들리기에는 너무 철이 일렀다. 살여울 물소리도 들릴 것같이 그렇게 천지는 고요하였다.

 

숭은 살여울 물가에 나섰다. 숭이 어릴 때까지도 이 물가에는 늙고 붉은 소나무들이 있었지마는, 그것마저 찍어먹고 인제는 한두 길 되는 갯버들이 있을 뿐이다. 검은 밤 들에 물빛은 그래도 희끄무레하였다. 짭짭 하고 소리를 내며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 위 살여울에 물이 굴러내리는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온다.

 

숭은 이 물에 연상되는 어린 때의 꿈, 한없는 하늘, 땅, 쉼없이 흘러 가는 강물, 인생, 이 물에 고달픈 잠이 들어 있는 살여울 동네, 서울에 두고 온 아내…끝없는 생각을 하면서 물가로 오르락내리락 하였다.

 

닭이 울었다. 닭은 무엇을 먹고 사나, 닭도 한갑 어머니처럼 기름기가 없을 것이다-이렇게 숭은 혼자 생각하였다.

 

동편 하늘에 남빛이 돈다. 이것은 서울서는 못보던 빛이다. 그 남빛이 점점 짙어져서 자줏빛으로 변해 온다. 산들의 모양이 더욱 분명하게, 그러나 아직도 검은 한빛으로 푸른 하늘 면에 나타난다. 흐르는 물조차도 좀더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늦은 여름 새벽에 보는 골안개가 일어났다. 아직 저 안개가 일어나기에는 이른 때지마는, 높은 산과 강이 있는 탓인지 여기저기 뿌유스름한 안개가 피어 올랐다. 오른다는 것보다도 소리없이 끼었다.

 

살여울 물이 하늘의 남빛을 받아 청빛으로 보인다.

 

어디서 벌써 말방울 소리가 난다.

 

무너미로서 살여울을 건너 방앗머리, 굿모루를 돌아 검은 오리장으로 통한 큰 길이 바로 이 동네 옆으로 지나가게 된다. 아마 무너미서 자고 검은 오리장을 보려고 가는 장돌림꾼의 짐 실은 당나귀 방울 소릴 것이다. 그 당나귀 등에는 인조견, 광목, 고무신, 댕기, 얼레빗, 참빗, 부채 등속이 떨어진 보자기에 싸여서 실렸을 것이요, 그 뒤에는-숭의 생각은 막혔다.

 

그 뒤에는 예전 같으면 짚세기 감발에 갓모 씌운 갓을 쓴 흔히는 꽁지 땋아 늘인 사람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야 웬 그렇게 차렸을라고. 숭은 그 당나귀 뒤를 따르는 사람의 모습이 도무지 그의 생각에 들지를 아니하였다.

 

"딸랑딸랑."

 

당나귀 방울소리가 골안개 속으로 멀어간다. 숭의 생각은 그 소리를 따라갔다.

 

신작로가 나고 자동차가 다니고, 짐 트럭까지 다니게 된 오늘날에는 조선 땅에 말과 당나귀의 방울 소리도 듣기가 드물게 되었다. 그것이 문명의 진보에 당연한 일이겠지마는 숭에게는 그것도 아까왔다. 그 당나귀를 끌고 다니던 사람은 무얼 해서 벌어 먹는지 심히 궁금하였다.

 

살여울 동네는 미투리를 삼는 것을 부업을 삼았으니, 고무신이 난 뒤여서 그런지 미투리 틀을 못 보았다.

 

동편 하늘은 더욱 밝아지고 붉어진다. 멀지 아니해서 둥그런 빛에 차고, 열에 차고, 영광에 찬 해가 올라올 것이다.

 

"그 해가 오르는 것이나 보고 가자"

 

하고 숭은 물가에 쑥 내어민 산 코숭이에 올라갔다. 여기도 숭이가 서울로 가기 전에는 늙은 소나무가 많이 있어서 여름이면 늙은이와 아이들이 올라와 놀더니, 지금은 오직 구부러진 소나무 한 개만이 서 있을 뿐이다. 아아, 몹시 구부러진 덕에 찍히기를 면한 모양이다.

 

"팔아먹을 수 있는 것은 다 팔아먹었구나!"

 

하고 숭은 늙은 소나무 뿌리에 걸터앉으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몸은 밤새도록 흘린 땀에 아직도 끈적끈적한데 그래도 새벽 바람이 선들선들하다. 이틀 밤째 새우는 숭의 머리는 퍽 무거웠다. 눈도 아팠다. 그러나 가슴속은 형언할 수 없는 불안과 괴로움으로 끓었다.

 

"나는 장차 어찌할 것인고"?

 

하고 숭은 굉장하게 빛을 발하고 거드름을 피우면서 흰 하늘의 고개로 올려 솟는 햇바퀴를 바라보았다. 여러 해 막혔던 자연의 아침 해! 숭의 가슴은 눈과 함께 환하게 트이는 것 같았다.

 

"그 빛, 그 힘!"

 

하고 시인 아닌 숭은 간단한 찬미의 단어로 아침 해를 찬탄하였다.

 

독장산, 살여울 벌, 달내강 물-모두 빛과 힘에 깨었다. 환하다. 강과 논의 물, 풀잎 끝에 이슬 구슬이 모두 황금빛으로 빛났다. 더위와 물것과 근심으로 밤새에 부대낀 살여울 동네도 학질 앓고 일어난 사람 모양으로 빛속에 깨어났다.

 

"인제 동네로 내려가자"

 

하고 숭은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