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은 한 손으로 연해 물동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떨어버리며 뒤도 아니 돌아보고 간다.
해가 솟았다. 순의 물동이의 한편 쪽이 햇빛에 반사하여 동이에 맺힌 물방울에서 수없는 금빛 줄기가 난사하였다.
순의 고무신 신은 두 발이 축축하게 젖은 흙을 밟고, 때로는 길가에 고개 숙인 풀대를 건드리며 점점 작아가는 양, 검은 빛인지 붉은 빛인지 분별할 수도 없는, 때 묻고 물 날고 떨어진 댕기, 그것이 풀 죽은 광당포 치마에 스쳐 흔들리는 양을 숭은 이윽히 보고 섰다가, 그것조차 아니 보이게 된 때에 숭은 힘 빠진 사람 모양으로 길가 돌 위에 걸터앉았다.
숭은 한 손으로 머리를 버티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숭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집 잃은 사람, 길 잃은 사람, 모든 희망을 잃은 사람인 것을 스스로 느낀 것이었다.
숭은 어젯밤 가정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던 일을 생각하였다. 그의 아내 정선이가,
"에끼, 시골뜨기, 에끼, 똥물에 튀길 녀석."
하고 자기에게 갖은 욕을 퍼붓고, 나중에는 세수대야를 자기에게 뒤집어 씌우던 것을 생각하였다.
그 직접 이유는 숭이가 이 남작집 소송 의뢰를 거절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소송은, 이 남작과 그 부인과, 이 남작의 아들과 기타 친족들이 관련된 간음, 이혼, 동거 청구, 재산 다툼 같은 것을 포함한 추악하고 복잡한 사건으로서, 착수금이 이천 원이라는 변호사 직업하는 사람이 침을 흘리는 소송이었다. 그 뿐더러 이 소송은 윤 참판의 소개로 허숭에게로 돌아온 것이요, 또 허숭이가 김 자작집 재산 싸움 소송에 이겼다는 것이 서울 사회에 이름이 높아진 까닭이었다.
만일 이 소송을 이기는 날이면 십만 원 가까운 사례금이 오리라는 것인데, 숭은 김 자작집 소송에 양심의 가책을 받은 관계로 다시는 이런 추악한 사건에는 관계를 아니한다고 맹세하여 이것을 거절해버려서, 그 사건은 마침내 어느 일본 변호사와 조선사람 변호사와 두 사람에게로 넘어가게 된 것이었다. 이것이 정선의 감정을 격분시킨 것이었다.
"그저 그렇지, 평생 남의 집 행랑방으로나 돌아댕겨. 원체 시골 상놈의 자식이 그렇지 그래"
하고 정선은 남편이 굴러 들어오는 복을 박차 내버리는 것이 그가 시골 상놈의 자식이기 때문이라고 단언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근인에 지나지 못하였다. 숭과 정선과 가정 생활을 하는 날이 깊어 갈수록 두 사람의 생각에는 점점 배치되는 점이 많아졌다. 대관절 두 사람의 인생관이 도무지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그것이 점점 탄로가 된 것이었다.
"이 세상에 돈이 제일이지."
하는 것이 정선의 근본 사상의 제일조였다. 둘째는 그가 말로 발표는 아니하더라도 또 한 가지 근본 사상이 있는 것을 숭은 정선에게서 발견하였다. 그것은 성욕을 중심으로 한 향락 생활이었다. 마치 정선의 호리호리한 어여쁜 몸이 전부 성욕으로 된 듯한 생각을 줄 때가 있었다. 이것이 숭에게는 못마땅하였다.
숭의 생각에는, 고등한 교육을 받지 아니하였더라도 인격의 존엄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보다도 음란하다는 말을 듣지 아니하는 사람으로는 성적 욕망이라는 것은 비록 부부간에라도 서로 억제할 것이라고, 서로 보이지 아니할 것이라고 믿었다. <서로 대하기를 손같이 하라> 하는 동양식 부부 도덕에 젖은 때문인가 하고, 숭은 혼자 저를 의심해보았다. 그래서 아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 보려고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숭에게는 자기를 낮추는 듯한 심히 불쾌한 일이었다. 그가 애써서 수양해 온 인격의 존엄이라는 것을 깨뜨려버리는 것이 싫었다.
그러나 숭의 인격의 존엄을 지키려 할 때에 정선은 이것이 사랑이 없는 까닭이라 원망하고, 심하면 유순이라는 계집아이를 못 잊는 까닭이라고 해서 바가지를 긁었다.
원망하는 여자의 얼굴, 질투의 불에 타는 여자의 얼굴은 숭의 눈에는 심히 추하였다. 아내의 눈에서 질투의 불길이 솟고, 그 혀끝에서 원망의 독한 화살이 나올 때에 숭은 몸서리가 치도록 불쾌하였다. 자기의 사랑하는 어여쁜 아내의 속에 이런 추악한 것이 있는 것이 슬펐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요, 여러 번 거듭할수록 숭의 눈에서는 아내의 아름다움이 점점 스러졌다.
순결한 청년 남자로서 그리던 여자의 아름다움, 여자의 몸을 쌌던, 여자의 아름다운 맘에서 증발하는 증기라고 믿던 분홍빛 안개가 걷혀버리고, 여자는 마치 육욕과 질투, 원망과 분노를 뭉쳐 놓은, 보다 싫은 고깃덩어리로 보였다. 그렇게도 아담스럽고 얌전하고, 정숙하게 보이던 정선이가 이 추태를 폭로하는 것을 볼 때에 숭은 여자의 허위, 가식이라는 것을 아프게 깨달았다.
왜 내 아내 정선이가 얌전, 정숙, 그 물건이 아닌가 하고 울고 싶었다. 미소거미(여자를 미워하는 성질)를 자기가 가졌는가고 스스로 의심하여 아내 정선을 재인식하려고 힘도 써 보았다. 그러나 정선은 갈수록 더욱 평범 이하의 여성에 떨어지는 것같이 숭의 눈에 비치었다.
숭은 마침내 자기의 정성을 가지고 정선의 정신 상태를, 도덕 표준을, 인생관을 보다 높은 곳으로 끌어 올리려고도 결심을 해보았다. 그러나 숭의 정성된 도덕적 탄원은 정선의 비웃음거리만 되고 말았다. 정선에게는 남편인 숭에게 대한 우월감이 깊이깊이 뿌리를 박은 것 같았다. 숭의 말이면 무엇이나 비웃고 반대하였다. 그러할 뿐더러 정선은 적극적으로 빈정대고 박박 긁어서 숭을 볶는 것으로 한 낙을 삼는 것같이도 보였다.
재판소에서 돌아오기만 하면 숭의 마음에는 조금도 화평과 기쁨이 없었다. 대문 안을 들어서기가 끔찍끔찍하였다. 요행 웃는 낯으로 맞아주는 때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잘 때까지 사오 시간 어떻게나 유지하나 하고, 숭은 애를 쓰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다. 그러다가 무슨 일만 생기면 이 무장적 평화는 순식간에 깨어지고 집안은 찬바람이 도는 수라장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아, 못 견디겠다. 이러하다가는 내 인생은 내외 싸움에 다 허비해버리고 말겠다."
고 자탄을 발하게 되었다.
이런 일을 수없이 하다가 어젯밤에 대파탄이 일어나 숭은 단연히 집을 버리고 뛰어나온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앉았을 때에 숭의 곁에는 서슬이 푸른 경관 세 명이 달려왔다.
숭은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셋 중에서 가장 똑똑해 보이는 순사가 바싹 숭의 가슴 앞에 와 서며,
"당신 무엇이요"?
하고 무뚝뚝하게 물었다.
"무엇이요"?
하는 말에 숭은 좀 불쾌했다.
"나 사람이요."
하고 숭도 불쾌하게 대답하였다.
"그런 대답이 어디 있어"?
하고 곁에 섰던 순사가 숭에게 대들었다.
"사람더러 무엇이냐고 묻는 법은 어디 있어"?
하고 숭도 반말로 대답했다.
"이놈아, 그런 말버릇 어디서 배워 먹었어"?
하고 곁에 섰던 또 다른 순사가 숭의 따귀를 갈겼다. 연거푸 두 번을 갈기는 판에 숭의 모자가 땅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