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네들도 신 참사의 호령에 마지못하여 절벅절벅 기수의 앞으로 왔다. 신 참사의 뜻을 어기는 것은 곧 당장 밥줄을 끊는 것임을 그들은 잘 인식한 것이다. 저쪽에서 삿갓을 가지고 놀고 있던 아이도 웬일인가 하고 달려와서 근심스러운 눈으로 자기네 부모와 무서운 사람들과를 번갈아 보았다.
부인네들은 내외성 있게, 혹은 제 남편의, 혹은 오라버니의 등 뒤에 숨어 섰다.
사람들이 다 앞에 모여 선 것을 보고 농업 기수는 연설 구조로, 반말로, 어, 아, 으 하고 마치 조선말이 서투른 외국사람의 발음 모양으로 효유를 시작하였다. 그는 얼굴이 검고, 코가 납작하고, 머리 뒤가 넙적하고, 찌그러진 천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어떤 농부의 아들이라고 한다.
"모를 내는 데는 정조식이라는 것이 있단 말야."
하고 그는 자기도 잘 알지 못하는 어려운 말을 섞어가며, 가끔 일본말을 섞어가며 일장 설명을 하였다.
그리고는 말이 끝나자 유순을 가리키며,
"이리 나서!"
하고 농업 기수가 호령을 하였다.
유순은 아니 나섰다.
"무슨 말씀이셔요? 그 애가 부끄러워서 그럽니다."
하고 유순의 과수 아주머니가 대신 말하였다.
"웬 잔말이야? 걔더러 하는 말이 아냐!"
하고 기수는 성을 내었다.
과수 아주머니는 한숨을 쉬고 입을 다물었다.
"이리 나와. 어른이 나오라면 나오는 것이야!"
하고 이번에는 신 참사가 호령을 하였다. 그래도 유순은 과수 아주머니 등 뒤에서 나오지를 아니하였다.
"조런 년 보았겠나."
하고 농업 기수는 더욱 성을 내며 발을 굴렀다.
"그래 내가 이리 나오라는데 아니 나올 테야. 내가 이를 말이 있어서 나오라는데. 방자한 계집애년 같으니. 내가 누군 줄 알고 요년, 그래도 아니 나와."
하고 기수는 막아선 과수 아주머니를 한 편으로 밀어 제치고, 유순의 볏모 든 팔목을 잡아당기었다. 유순의 볏모에 묻었던 흙물이 기수의 흰 양복과, 신 참사의 모시 두루마기에 수없는 얼룩을 주었다.
"이년, 네가 낸 모를 다시 뽑아서 다시 내어라."
하고 농업 기수는 손바닥으로 유순의 뺨을 때렸다. 기수와 신 참사는 옷에 흙물 튄 것이 더욱 열이 났다.
"여보!"
하고 한 청년이 기수의 앞으로 나서며, 유순의 팔목을 잡은 기수의 팔을 으스러져라 하고 꽉 쥐어 비틀었다.
"관리면 관리지, 남녀유별도 모른단 말요? 남의 집 과년한 처녀의 손목을 잡고 뺨을 때리는 법은 어디서 배웠단 말요? 당신 집에는 어미도 없고 누이도 없소"?
하고 대들었다. 그 청년은 키가 크고, 콧마루가 서고 음성이 큰 건장하고도 다부진 사람이었다.
"허, 이놈 보았나. 관리에게 반항한다."
하고 기수는 손을 들어서 청년의 뺨을 갈겼다. 그 서슬에 청년의 코가 기수의 손길에 맞아 코피가 흘러내렸다.
기수는 청년의 코에서 피가 흐르는 것도 상관없이 연해 서너 번 청년의 이 뺨 저 뺨을 후려갈겼다. 청년은 처음에는 참으려 하는 듯하였다. 그는 기수가 때리는 대로 말없이 맞았다. 그러나 기수의 구둣발길이 청년의 옆구리에 올라오려 할 때에 청년의 몸이 한번 번쩍 보이며 청년의 손은 기수의 목덜미를 눌러버렸다. 청년의 코에서 흐르는 피는 농업 기수의 양복 저고리에 똑똑 떨어졌다.
"이놈아."
하는 그 청년의 목소리는 떨렸다.
"이놈, 남의 처녀의 손목을 잡고, 뺨을 갈기고-넌 이놈, 하늘 무서운 줄도 모르느냐"?
하고 청년은 기수를 홱 잡아 내어둘러서 반듯이 자빠뜨렸다.
"그놈을 죽여라!"
하고 다른 사람들이 덤비었다.
청년은 두 팔을 벌려서 모여드는 사람을 밀어내며,
"다들 가만 있어요. 이깐 놈 하나는 내가 없애버릴 테니. 너 죽고 나 죽자. 이 개 같은 놈 같으니."
하고 청년은 발길로 기수의 옆구리와, 꽁무니와, 머리를 닥치는 대로 질렀다.
"아이구, 아이구구."
하고 죽는 소리를 하였다.
"이 사람, 이게 무슨 짓인가."
하고 신 참사가 청년의 팔을 붙들 때에는 벌써 기수는 청년이 가만히 있는 틈을 타서 모자도 다 내버리고 허둥지둥 달아날 때였다.
"저놈 잡아라!"
하고 사람들이 소리를 지를 때에, 기수는 황겁하여 논물에 엎드러졌다. 그리고는 다시 일어나서는 달음박질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