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참판집에서는 내일이 혼인날이라 하여 손님도 많이 오고 예물도 많이 들어와서 바쁘기가 짝이 없었다.

 

그 날 저녁때에 허숭은 들러리 설 친구, 기타의 주선을 위하여 밖에 돌아다니다가 늦게 윤 참판집에 돌아왔다.

 

방에 돌아온 숭은 의외의 광경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정선이가 잔뜩 성을 내어 가지고, 들어오는 자기를 노려보는 것이었다.

 

사람이란 성을 내면 흉악한 모양으로 변하는 것이지마는, 이때 정선의 얼굴은 실로 무서웠다. 숭은 그 눈초리가 좌우로 쑥 올라가고 입귀가 좌우로 축 처진 정선의 상을 볼 때에 몸에 소름이 끼침을 깨달았다. 그것은 평상시에 보던 정선은 아니었다. 그 마음에는 독한 불이 붙고, 눈에서는 수 없는 독한 칼날이 빗발같이 쏟아져 나와서 허숭의 가슴을 쏘는 듯하였다.

 

허숭은 어안이 벙벙하여 섰다. 섰다는 것보다도 다리의 근육이 굳어지고 말았다.

 

"웬일이오"?

 

하고 허숭은 마침내 이 의문을 해결하는, 처음으로 입을 열 사람은 자기라는 것을 깨닫고 말을 붙였다.

 

"에익, 더러운 놈!"

 

하는 것이 정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었다.

 

"더런 놈"?

 

이 말에 숭은 한번 더 진저리를 쳤다. 그리고 일종의 모욕과 분노를 깨달았다.

 

"말을 삼가시오."

 

하고 허숭은 남편의 위엄을 부려 보았다.

 

"말을 삼가, 흥"?

 

하고 정선은 코웃음을 쳤다. 그 얼굴은 분노의 형상에서 조롱의 냉소의 형상으로 변하였다.

 

"대관절 무슨 일이오"?

 

하고 허숭은 교의에 앉았다. 그 때에 허숭은 정선의 손에 쥐어진 종이 조각을 보았다. 숭은 거의 반사적으로 <유순>을 생각하였다.

 

"그건 무엇이오"?

 

하고 숭은 손을 내어밀었다.

 

"자, 실컷 잘 보우."

 

하고는 정선의 낯에는 경련이 일어나더니, 테이블 위에 엎드려 울기를 시작한다.

 

숭은 정선의 손에 꾸기었던 편지를 펴가며 읽었다. 그리 익숙치 못한 연필 글씨로 보통학교 작문 책장을 찢어서 잘게잘게, 그러나 선생에게 바치는 작문 글씨 모양으로 분명하게, 오자는 고무로 지워가며 쓴 편지다. 안팎으로 쓴 것이 석 장 여섯 페이지요, 끝에는 <兪順(유순)>이라고 비교적 자유로운 글씨로 서명을 하였다.

 

그 편지는-

 

《처음이요, 마지막으로 이 편지를 올립니다》

 

를 허두로,

 

《그 동안에도 편지라도 자주 드리고 싶은 마음 간절하였사오나, 여자가 남자에게 편지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와 편지도 못 올렸나이다. 그러하오나 재작년 여름에 작별하온 후로 작년 여름에도 여름이 다 가도록 서울서 오는 차마다 바라보고 기다렸사오나 마침내 오시지 아니하시고, 금년에도 여름이 다 가도록 기다리었사오나 소식이 없사와 혼자 어리석은 마음을 태우고 있사옵던 차에, 일전 어떤 동무의 집에서 잡지를 보고야 이번 어떤 유명한 부자집 따님과 혼인을 하시게 되었다는 글을 보았나이다. 당신께서 고등문관 시험에 급제하셨단 말을 신문으로 볼 때에는 온 동네와 함께 저도 기뻐하였사오나, 이번 어떤 부자집 따님과 혼인을 하시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동네는 다 기뻐하지마는 저와 제 부모님은 슬픔에 찼나이다》

 

유순의 편지는 계속된다.

 

《제 어리석음을 용서하세요. 저는 재작년 여름에 당신께서 저를 특별히 사랑하여 주시길래 그것을 꼭 믿고 저는 당신의 아내거니 하고 꼭 믿고 있었나이다. 그러다가 작년부터 아버지께서 자꾸만 시집을 가라고 조르실 때에 저는 어리석게도 당신께 허락하였다고 말씀하였답니다. 제 부모께서도 그러면 작히나 좋으냐고 기뻐하셨나이다. 작년에는 꼭 오실 줄 믿고, 작년 여름에 오시며는 부모님께서 약혼만이라도 하여준다고 하시고 기다렸사오나 도무지 오시지를 아니하시니, 부모님께서는 그 사람이 너를 잊었으니 다른 데로 시집을 가라고 또 조르시기를 시작하였사오나, 저는 울면서 아니 갑니다, 아니 가요, 하였나이다.

 

당신께서도 아시는 바여니와, 우리 동네에서는 아직 한번 맘으로 허락하였던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로 시집을 간 사람은 없었나이다. 내 조고모께서는 사주만 받고도 그 남자가 죽으매 일생을 그 집에 가셔서 늙으셨고, 당신 댁에서도 남편이 죽은 뒤에 소상을 치르고는 뒷동산 밤나무 가지에 목을 달아 돌아가신 이가 있다 하나이다. 그것을 다 구습이라고 동네에서는 말하는 이가 없지 아니하나, 어리석은 제 맘은 그 본을 따를 수밖에 없다 생각하나이다. 부모님께서 정해 주신, 한번 얼굴도 대해 보지 못한 남자를 위해서도 절을 지키거든, 저와 같이 제 맘으로 사랑하고 또 비록 잠시라도 당신의 품에 안겨 본 당신께서 저를 잊어버리신다고 저마저 당신을 잊고, 이 몸과 이 맘을 가지고 또 다른 남자를 사랑할 생각은 없나이다.

 

그러하오나 당신께서는 부자댁 아름다운 배필과 혼인을 하시게 되시었으니 저는 멀리서 두 분의 행복을 빌겠나이다.

 

저는 쓸 줄도 모르는 솜씨로 이런 편지를 쓸까말까 하고 쓰려다가는 말고, 썼다가는 찢고 하기를 오륙 일이나 하다가, 그래도 두 분이 혼인 예식을 하시기 전에 이러한 말씀이나 한번 드리고 싶어서 이 편지를 쓰나이다. 두 분이 혼인 하신 뒤에는 다른 여자가 당신께 편지를 드리는 것이 옳지 아니하리라고 생각한 까닭이로소이다.

 

 시월 오일 兪順 上(유순 올림)》

 

이라고 쓰고 그 끝에 추고 모양으로 이렇게 썼다.

 

《이 편지를 써 놓고도 부치는 것이 죄가 되는 것 같아서 못 부치고 일 주일 동안이나 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이야 기운을 내어서 체신부에게 부탁해 보냅니다. 유순》

 

숭은 편지를 다 읽고나서는 힘없이 방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날 밤이 다 새도록 잠을 못 이루고 고민하였다.

 

"밤중으로 달아나서 유순에게로 갈까"-이렇게도 생각해보았다.

 

"차라리 정선과 윤 참판에게 남아답게 혼인을 거절하고 유순에게로 갈까"-이렇게도 생각해보았다.

 

이러한 생각을 하기만 해도 한결 맘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일이 혼인 예식인데, 내일 오후 세시만 지나면 만사는 해결되는데-행복(?)된 길로 해결되는데"-이렇게도 생각하였다.

 

숭은 이 세 가지 생각을 삼각형의 세 정점으로 삼고 개미 쳇바퀴 돌 듯이 그 석 점 사이로 뱅뱅 도는 동안에 밤이 새고 혼인 예식 시간이 왔다. 숭은 예복을 갈아 입으면서도, 자동차로 식장에 가면서도 이 석 점 사이로 뱅뱅 도는 동안에 밤이 새고 혼인 예식 시간이 왔다. 숭은 예복을 갈아 입으면서도, 자동차로 식장에 가면서도 이 석 점 사이로 방황하였다. 그리고 목사의 앞에 정선과 나란히 서서 서약을 할 때에도 그러하였고, 반지를 끼일 때에는 숭의 눈은 정선의 손가락을 바로 찾지 못하여 반지를 땅에 떨어뜨릴 뻔하여 깜짝 놀란 일도 있었다.

 

혼인 마치나 회중이나 모두 숭의 감각에는 들어오지 아니하였다. 신부의 팔을 끼고 마치에 발을 맞추어 식장에서 나올 때에도 숭은 신부의 발을 밟을 지경으로 무의식하였다.

 

<1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