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경은 그 날 이건영이 보기에 대단히 귀족적이었다. 몸이 갸냘프나, 그 갸냘픈 것이 도리어 건영에게는 귀족적으로 보였다. 그 얼굴이나 몸맵시나 이 세상 사람은 아닌 듯한 우아함이 있었다. 이건영의 생각에 이 우아함은 도저히 심순례에게서 찾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때에 이건영은,

 

"아아, 내가 왜 벌써 심순례라는 여자와 깊이 사귀었나. 그를 내 아내로 알고 있었다. 내게는 그보다 더 훌륭한 아내가 있지 아니한가. 아아, 내가 경솔하였다!"

 

이렇게 후회하였다.

 

그러나 이건영은 다시 도망할 길을 찾아내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심순례와 약혼한 것은 아니어든, 약혼을 발표한 것은 아니어든"

 

하고 혼자 다행으로 여겼다.

 

딴은 이건영은 심순례와 약혼은 아니하였다. 한 선생이 심 주사의 뜻을 받아 이건영에게 약혼을 청할 때에 이건영은,

 

"선생님, 그것은 일편의 형식이 아닙니까. 약혼은 다 무엇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이 말을 한 선생은 그대로 믿고, 심 주사 내외와 심순례도 그대로만 믿었다. 그리고 이 박사의 취직 문제가 해결이 되는 대로 혼인식은 거행될 것으로 믿었다. 사실상 심 주사 집에서는 혼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더구나 이건영이가 공주에 가 있는 동안에 순례에게 하루 건너 한 장씩 보내는 편지를 보고는 아무도 이 혼인을 의심할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그 편지들 중에 아무 것이나 한 장을 골라 눈에 뜨이는 대로 읽어 보자-

 

"어젯밤은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하였소. 그것은 웬일인지 아시오? 그대 때문이오. 그대를 내 품에 품어 영원히 놓지 아니하고 싶은 때문이오"

 

또 어떤 곳에서는,

 

"아아, 내 순례여. 이 세상에 오직 하나인 내 순례여. 그대는 어떻게 이렇게도 내 피를 끓게 하는가, 내게서 사라졌다고 생각하였던 정열이 어떻게도 그대의 고운 눈자위, 보드라운 살의 감촉으로 이렇게도 불이 타게 하는가. 아아, 그대의 살의 감촉, 그 체온!"

 

이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편지가 온 뒤로는 통신이 뚝 그쳤다. 그가 공주를 떠나 광주로 목포로 다니는 동안에는. 그가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온 뒤에도, 그는 순례에게 대해서는 편지 한장, 말 한마디 없었다.

 

이것이 곧 은경에게 관한 말을 들은 뒤였다. 이 말을 들은 것은 공주에서였다. 한은 선생은 공주에 있는 그의 족질을 시켜 이건영에게 서울 오는 대로 만날 것을 말하였고, 그 족질은 이것이 혼인에 관한 일이라는 것을 말하였다. 한은 선생의 족질이라는 이는 미국에서 이건영과 동창이었던 사람이다.

 

한 선생은 이러한 사정을 자세하게 알지는 못하나 대강은 들었다.

 

"그러나 설마"?

 

하고 한 선생은 이건영을 믿어서 스스로 부인하였다. 은경과 건영과의 혼인말이 심 주사 집에까지 굴러 들어가서, 심 주사가 한 선생을 찾아왔을 때에도 한 선생은,

 

"이 박사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십년을 못 볼 곳에 있더라도 그럴 리가 없습니다."

 

하여 굳세게 부인하였다.

 

"선생님, 저는 갑니다."

 

하고 이건영이 일어났다.

 

"내게 더 할말이 없소"?

 

하고 한 선생은 힘있게 물었다.

 

"없습니다."

 

하고 이건영은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대문 밖에 나섰다.

 

한 선생이 이건영을 따라 대문 밖에 나설 때에, 무심코 한 선생집을 향하여 걸어 오던 심순례가 이건영을 보자마자,

 

"악!"

 

한마디 소리를 지르고는 비틀비틀 땅에 쓰러지려 하였다. 한 선생은 얼른 순례를 안아 일으키었다.

 

순례가 한민교의 팔에서 기절하는 것을 보고 이건영은 손에 들었던 지팡이를 땅에 떨어뜨리도록 놀랐다. 그러나 그는 곧 지팡이를 집어들고 빠른 걸음으로 골목을 빠져 나가버렸다.

 

한민교는 순례를 안아서 방에 들어다 뉘었다. 부인과, 한 선생의 딸 정란은 놀라서 어안이 벙벙하였다.

 

"냉수 떠와!"

 

하고 한 선생은 소리를 질렀다. 한 선생은 해쓱한 순례의 낯에 냉수를 뿌리고 손발을 주물렀다.

 

이 때에 허숭이가 말쑥한 스코친 춘추복에 스프링 코트를 벗어 팔에 걸고 들어왔다. 그는 학생복을 입었을 때보다 훨씬 훌륭한 신사가 되었다. 아무도 그를, 바로 몇 달 전까지의 남의 집 심부름을 하고 고학하던 사람으로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엔 벌써 만족의 빛이 나타나고 분투하려는 힘이 줄었었다.

 

허숭은 혼인에 관한 의논을 하려고 한 선생을 찾아 온 것이었다.

 

허숭은 순례의 꼴을 보고,

 

"웬일입니까"?

 

하고 한 선생에게 물었다.

 

이때에 순례는 정신을 돌려서 눈을 떴다.

 

한 선생은 허숭의 말에는 눈으로만 대답하였다. 그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