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골공원 벤치에 앉은 건영은 이른바 윗절에도 못 믿고 아랫절에도 못 믿는 격이어서 순례와 은경을 둘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모두 한민교의 책동인 것을 생각하면 한민교를 찾아가서 그 다리라도 분질러주고 싶었다. 그러나 건영에게는 그런 용기도 없었다. 다리를 분지르기는커녕, 한 선생과 대면하여 톡톡히 항의를 할 용기도 없었다. 그것은 제 잘못도 잘못이려니와 원체 그만한 기력이 없었다.

 

건영은 가슴이 텅 비인 것 같아서 도무지 마음을 둘 곳이 없었다. 조선에는 젊은 여자가 많다. 순례나 은경이 아니기로 여자 없어서 사랑 맛 못 보랴-이렇게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하여도 순례나 은경이만한 여자는 쉽사리 만날 것 같지를 아니하였다.

 

"그러면 순례한테로 다시 찾아갈까"-이렇게도 건영은 생각해보았다.

 

"순례는 참된 여자라, 만일 내가 돌아간다면 반드시 모든것을 용서하고 환영해 줄 것이다. 그렇고말고. 순례는 그렇게도 맘이 착하고 너그러운 여자다. 한번 맘을 작정하면 변할 줄 모를 여자다. 그렇고말고, 나는 순례한테로 돌아갈까"?

 

건영은 이렇게 생각하니 맘이 가벼워지고 캄캄한 앞길에 한 줄기 빛이 비치어옴을 깨달았다.

 

"요, 이거 누구요? 이 박사 아니오"?

 

하는 술 취한 소리와 함께 건영의 어깨를 치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은 김갑진이었다. 그리고 모를 청년 둘이었다.

 

건영은 비밀히 하던 생각을 들키기나 한 듯이 일변 놀라고 일변 낯을 붉히며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웬일이야"?

 

하고 갑진은 건영이의 목에 팔을 걸어 안으로 잡아 끌며,

 

"들으니까 한 은경이하고 약혼을 했데그려. 자, 오늘 한잔 내게."

 

하고 두 동행을 한팔로 끌어 당기며,

 

"이놈들, 다 이리 와. 이 양반은 누구신고 하니 말이다, 저 아메리카 가셔서 닥터 오브 필로서피를 해 가지고 오신 양반이란 말이다. 하하, 이 박사, 여보, 이 박사. 이놈들은 내 동문데 대학을 졸업하고도 소학교 교사 하나 못 얻어 하고 꼬르륵꼬르륵 밥을 굶는 못난 놈들이란 말요. 내임도 그렇지마는, 하하."

 

"이놈아."

 

하고 동행 중의 하나가 갑진의 뺨을 손가락으로 찌르며,

 

"이놈아, 네 놈은 계집까지 빼앗기지 않았어? 못난 놈 같으니. 우리는 직업은 못 얻고 카페 신세는 질망정 오쟁이는 안 졌단 말이다. 오라질 놈."

 

"이놈들아."

 

하고 갑진은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득득 긁으며,

 

"아서라 이놈들아, 그 말일랑 제발 말아라. 하하하, 이런 제길. 이 박사, 이놈들의 말 믿지 마시오. 내가 어디로 보면 오쟁이 질 양반이오? 하하하헙, 자, 이 박사, 폐일언하고 우리 카페 가서 한잔 먹읍시다. 이 박사와 같이 만사가 순풍에 돛을 달고 뜻대로 되는 이는 우리네 같은 룸펜을 한잔 먹여야 한단 말이오, 경칠 것, 가자."

 

하고 갑진은 두 팔로 세 사람의 목을 멍에를 매어 끌었다. 건영은 후배인 갑진에게 이러한 대접을 받는 것이 불쾌하였으나, 갑진의 팔을 뿌리칠 기운이 없었다.

 

갑진은 공원을 나와서 이 박사와 두 동무를 끌고 낙원동 어느 카페로 들어갔다.

 

붉은 등, 푸른 등, 등은 많으나 어둠침침한 기운이 도는 방에는 객이라고는 한편 모퉁이에 학생인 듯한 사람 하나, 웨이트레스 하나를 끼고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 아직 손님은 많지 아니하였다.

 

"이랏샤이."

 

하는 여자,

 

"어서 오십시오."

 

하는 여자, 사오 인이나 마주 나와서 네 사람을 맞았다. 모두 얼굴에는 되박을 쓰고 눈썹을 길게 그리고, 입술에는 빨갛게 연지를 발라 금시에 쥐를 잡아먹은 고양이 주둥아리 같고, 눈 가장자리에는 검은 칠을 해서 눈을 크게 보이려고 애를 썼다. 그들은 고개를 갸우뚱하고 엉덩이를 내어두르고, 사내 손님에게 대해서는 마치 남편이나 되는 듯이, 적어도 오라버니나 되는 듯이 응석을 부렸다.

 

"아이, 왜 요새는 뵙기가 어려워요"?

 

하고 양복 입은 계집애는 갑진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아다가 제 뺨에 비볐다.

 

"요것이 언제 보던 친구라고 요 모양이야"?

 

하고 갑진은 주먹으로 그 여자의 볼기짝을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아야, 아야, 사람 살리우!"

 

하고 그 여자는 갑진의 뺨을 꼬집어 뜯고, 성낸 모양을 보이며 달아났다.

 

네 사람은 테이블 하나를 점령하였다. 의자는 푸근푸근하였다. 테이블에는 오일 크로스를 깔아서 

살을 대기가 불쾌하였다.

 

"위스키, 위스키!"

 

하고 갑진은 집이 떠나갈 듯이 호령하였다. 그리고 나서는 갑진은 예쁘장한 계집애 하나를 무르팍 위에 앉히고 으스러져라 하고 꼭 껴안았다. 다른 사람 곁에도 계집애들이 하나씩 앉아서 껴안아 주기를 기다리는 듯하였다.

 

유리잔에 위스키 넉 잔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이년들아, 너희들은 안 먹니"?

 

하고 갑진은,

 

"에이, 귀찮다! 병째로 가져오너라. 백마표, 응!"

 

"올라잇!"

 

하고 한 여자가 술 벌여 놓은 곳으로 갔다. 거기는 회계당번인 여자와 남자 사무원 하나가 점잔을 빼고 앉아 있었다.

 

여덟 잔에 노르무레한 위스키가 따라진 뒤에 갑진은 술잔을 들며,

 

"제군! 미국 철학박사 이건영 각하와 한 은경양과의 약혼을 축하하고 두 분의 건강을 빕니다."

 

하고 잔을 높이 들었다. 다른 두 사람도 갑진과 같이 잔을 높이 들었다. 오직 이 박사만이 술잔을 들지 아니하였다.

 

"드세요."

 

하고 한 친구가 재촉하였다.

 

갑진은 술잔을 든 채로 로보트 모양으로 물끄러미 건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갑진의 눈은 <이놈!> 하는 빛을 띠고,

 

"나, 나, 나는."

 

하는 건영의 입술은 떨렸다.

 

"나는 약혼한 것이 아니야요. 또 장차도 약혼할 생각도 없고, 또…."

 

"이건 왜 이래."

 

하고 갑진은 들었던 잔을 도로 놓으며,

 

"대관절 어찌 된 심판야. 약혼 축하 건배를 하다말고 정전이 되니 이거 될 수 있나."

 

다른 사람들도 들었던 잔을 도로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