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 선생은 사랑에 있었다.
"아, 청오 오시오!"
하고 한민교를 반가이 맞았다. 청오라는 것은 한민교의 당호였다.
"아, 참 마침 잘 오셨소이다."
하고 한은 선생은 희색이 만면하여 하얀 아랫수염을 만지며,
"그렇지 아니해도 지금 사람을 보내서 오시랄까 하였던 길이외다."
하고 한은은 매우 유쾌하였다.
"오늘 이건영군과 내 손녀와 약혼을 하기로 되어서, 약혼 피로연을 할 것도 없지만 집안 사람들끼리 저녁이나 같이 먹으려고 해서 들으니까, 건영군은 선생께 수학도 하였고 또 많이 지도를 받았다고도 하고… 어, 그런데 마침 잘 오셨소이다."
하고 한 선생은 말을 꺼낼 새도 없이,
"이애, 저 이 박사 이리 오시라고 하여라."
하고 곁에서 놀고 있는 칠팔 세나 되었을 손자를 시킨다. 손자는 조부의 명령을 듣기가 바쁘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래 건강은 어떠하시오"?
하고 그제야 한은은 한민교에게 인사를 하였다.
"괜치않습니다."
하고 한민교는 모든 말하기 어려운 사정을 누르고,
"그런데 제가 선생께 온 것은 약혼이 되기 전에 한 말씀 여쭐 말씀이 있어서 온 것입니다. 그러나 벌써 약혼이 되었다면, 저는 이 말씀을 아니하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벌써 약혼은 되었습니까"?
한은 선생은 그 큰 눈을 더욱 크게 뜨고 놀라는 빛을 보였다.
"이 약혼에 대한 말씀이오"?
하고 한은은 겨우 물었다.
"그렇습니다."
하는 말은 더욱 한은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날 밤에 탑골공원 벤치에는 어떤 젊은 신사 하나가 고개를 폭 수그리고 앉아 있었다-그는 이건영이었다.
공원 벤치에 앉은 이건영-그는 마치 구만 리나 높은 하늘에서 나락의 밑으로 떨어진 듯하였다. 그에게는 이제는 재산 있고, 양반이요, 명망 높은 집 딸인 은경도 없고, 그를 따라 올 재산도 없고, 또 아마도 열에 아홉은 다 될 뻔하였던 연전 교수의 자리도 틀어져버렸다. 왜 그런고 하면 한은 선생은 연전의 이사요, 아울러 유력하게 이건영을 추천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래 일도 장래 일이려니와, 아까 한은 집에서 일어난 일, 자기의 망신을 생각할 때에 건영은 마치 앉은 벤치와 함께 땅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한민교가 한은과 같이 앉은 것을 보고 건영은 가슴이 내려앉았었다. 그러나 설마 하고 건영은 다만 하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손님들이 오고 나중에는 시골서 올라온 건영의 아버지까지도 왔다. 저녁상이 나왔다.
한은 선생은 아무일도 없는 듯이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로 세상 이야기를 꺼내었다. 마치 약혼에 관한 것은 잊어버리기나 한듯이. 건영은 초조한 마음으로 한은 선생의 입에서 오늘 모임의 목적인 혼인말이 나오기를 바랐으나 식사가 거의 다 끝이 나도록 아무말이 없는 것을 보고는, 한은 선생의 입에서 무슨 무서운 선고나 아니 내릴까 하여 도리어 그 음성이 무서워서 감히 한은 선생 쪽으로 눈을 향하지를 못하였다. 건영도 남과 같이 수저를 움직이기는 하였지마는 무엇을 집었는지, 무엇이 입에 들어갔는지 말았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식사가 끝난 뒤에 한은 선생은 한참이나 입을 우물우물하고 침묵을 지켰다. 손님들도 어리둥절하였다.
마침내 한은 선생의 입이 열렸다.
"오늘, 이건영 박사와…"
하고 한은 선생의 말이 열릴 때에 건영은 등에다가 모닥불을 끼얹는 듯하고 눈이 아뜩하였다.
"오늘, 이건영 박사와 내 손녀와 약혼을 하려고 하였는데 의외의 사정이 생겨서 아니하기로 되었소이다. 그 사정이 무엇인지는 내가 말하기를 원치 아니하지마는, 다만 내가 분명치 못해서 그리 된 것만은 사실이외다."
하고 냉랭하게, 그러나 엄숙하게 말을 맺고, 특별히 건영의 아버지 되는 이 장로를 향하여,
"모처럼 먼 길을 오셨는데, 일이 이렇게 되니 미안하기 그지없소이다."
하고 말하였다.
건영의 등에서는 기름땀이 흐르고, 이 장로의 낯은 파랗게 질렸다. 이 장로도 벌써 이 일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이 장로는 건영과 순례와의 관계를 알았고 또 기뻐하였던 사람이다. 그러나 한은 선생의 손녀인 은경과의 혼인말이 있다는 것을 그 아들 건영에게서 듣고는, 그 아들과 함께 순례로부터 은경에게로 맘이 옮아온 것이었다.
이 장로는 그래도 체면상, 이 망신에 대해서 한마디 항의를 아니할 수 없었다.
"지금 선생께서 영손애와 제 자식과 혼인 못할 사정이 있다 하시니, 그 사정을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였다.
그의 음성은 심히 냉정하지마는, 떨림을 먹은 것은 숨길 수가 없었다.
"그것은 아니 물으시는 것이 좋겠소이다. 만일 굳이 묻고 싶으시면 자제에게 물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한은 선생은 대답을 거절하였다.
이러한 광경을 보고 건영은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와버렸다.
나와 가지고는 발이 가는 대로 가는 것이 탑골공원이었다. 그러나 나온 뒤에 어떤 광경이 연출된 것을 건영은 모른다. 그러나 건영의 일생이 파멸된 것만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이리하여 건영과 은경과의 혼인이 틀어지고 말았고, 그 결과로 발명가 윤명섭과 은경과의 혼인이 맺어지게 된 것이었다. 그것이 또 우연한 인연으로 허숭과 정선과의 혼인과 한 날인 시월 십 오일에 정동 예배당에서 거행되게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