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여울 보에 오래 기다리던 물이 늠실늠실 불었다. 삼사 일 이어 오는 비에 살여울 강물이 소리를 내며 흘러, 오랜 가물에 늦었던 모를 내게 된 것이다.

 

논마다 허리 굽힌 사람들의 움직이는 양이 보였다. 길게 뽑는 메나리 가락도 들렸다. 비록 배는 고프더라도 젊은이에게는 기운이 있었다.

 

아침 나절까지도 비가 와서 부인네들은 삿갓을 등에 지고 모를 내었다. 그러나 인제는 비도 개고 파란 하늘조차 여러 조각의 흰 구름이 어울려 흥건하게 닿은 논물에 비치었다. 그래서 부인네들의 등에 졌던 삿갓은 논둑에서 노는 엄마 따라온 아이들의 장난감이 되었다.

 

혹은 벌거벗고 혹은 적삼만 입고 혹은 고쟁이만 입은 사내, 계집애들은 물장난을 하고 소꿉장난을 하였다. 그들의 몸은 볕에 그을러서 검었다. 그러나 도회의 아이들 모양으로 기름기는 없었다. 기름기가 있을 리가 있나. 그들은 만주 조밥에 구더기 끓는 된장밖에 먹는 것이 없거든. 젖먹이로 말하여도 절반이나 굶은 어머니의 젖을 젖이라기보다는 젖 묻은 그릇을 씻은 물이었다. 다만 물과 일광만이 아직 불하, 대하, 공동 판매도 아니되어서 자유로 마시고 쬐기를 허하였다. 그래서 이 아이들은 맘껏 볕에 그을고 맘껏 물배가 불렀다. 인제는 비가 와서 마른다 하던 우물도 물이 늠실늠실 넘었다.

 

모를 내는 여자들의 무릎까지 올려걷은 다리, 그것은 힘은 있을망정 살이 비치는 흰 명주 양말에 굽 높은 흰 구두를 신은 그러한 서울 아가씨네 다리와 같은 어여쁨은 있을 리가 없다. 모내는 아씨네, 아가씨네 다리들은 띵띵 부었다. 너무 오래 서 있어서, 너무 오래 물에 담겨서, 또 너무도 굶어서 부황이 나서. 만일 이 아씨네, 아가씨가 아픈 허리를 펴느라고 고개를 들고 두 손에 물이 옷에 묻지 말라고(젖을 옷도 없건마는) 닻가지 모양으로 좌우로 약간 벌리고 선다하면 그 얼굴도-일생에 한번밖에(그것도 시집 간 여자라야) 분 맛을 못 본 얼굴은 볕과, 굶음과, 피곤과, 너무 오래 고개를 숙임으로 퉁퉁하게 붓고, 또 찌그러져 보일 것이다. 땀과 때와 빗물과 흙물과 더위에 뜨고 쉬인 옷 냄새, 이 냄새가 농촌 모내는 사내의 코에는, 모기장 같은 상긋한 옷에, 불그레 뽀얀 부드러운 살이 비치는 서울 아씨네, 아가씨네의 몸에서 극성스럽게도 나는 향내와 같을 수 있을까.

 

늙은이도, 젊은이도, 여편네도, 처녀도, 한 손에는 못춤을 쥐고 한 손으로 두 대씩, 석 대씩, 넉 대씩 갈라서는 하늘과 구름 비친 물을 헤치고 말랑말랑한 흙속에 꽂는다. 꽂은 볏모는 바람에 하느적하느적 어린 잎을 흔든다. 인제 그들은 며칠 동안 뿌리를 앓고 노랗게 빈혈이 되었다가 생명의 새 뿌리를 애써 박고는 기운차게 자라날 것이다.

 

그러한 뒤에 알을 배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누렇게 익어서 고개를 숙여, 일생의 사명을 끝낸 뒤에는 아마도 모내던 손에 깎이어 알곡은 알곡 따로, 짚은 짚 따로 나고, 알곡은-아아 그 알곡은 모낸 이, 거두는 이의 알곡은 반은 지주의 곡간을, 반은 빚장이의 곡간을 다녀서 차를 타고 배를 타고 몇 상인의 이익을 준 뒤에 논바닥 물에 살은커녕 그림자 한번도 못 잠겨 본 사람들의 입에 들어가는 밥이 되고, 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논바닥에서 썩는 이 생명들은 영원한 가난뱅이, 영원한 빚진 종, 영원한 배고픈 사람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뻥>하고 고동소리가 들린다. 서울서 봉천으로 달아나는 기차다.

 

이 고동 소리에 모내던 사람들은 고개를 들었다. 그 사람들 중에는 유순이도 있었다.

 

유순은 재작년 초가을 허숭에게 안길 때보다 커다란 처녀가 되었다. 그는 길다란 머리꼬리를 한편으로 치우려다가 치마끈에 껴 졸라매어서 늘어지지 아니하게 하고 풀이 다 죽은 광당포 치마를 가뜬하게 졸라매고 역시 풀 죽은 광당포 적삼은 땀난 등에 착 달라붙어서, 통통한 젊은 여성의 뒷 태를 보인다. 비록 옷이 추하고 낯이 볕에 그을렀다 하더라도 순의 동그스름한 단정한 얼굴의 선, 수심을 띤 듯한 큼직한 검은 눈, 쭉 뻗고도 억세지 아니한 코, 더우기 특색있게 맺혔다고 할 만한 입, 그리고 왼손에 파란 잎, 하얀 뿌리의 나불나불 어린 애기와 같은 맛이 있는 볏모를 들고 논에 우뚝 서서 허리를 펴는 양으로 아무리 무심히 보더라도 눈을 끌지 아니할 수 없었다.

 

순의 얼굴에 약간 수척한 빛이 보이는 것은 여름 때문인가, 피곤 때문인가, 못 먹어서인가, 그렇지 아니하면 속에 견디기 어려운 무슨 근심을 품음인가. 아마 그것을 다 합한 것이겠다.

 

실상 유순은 허숭이가 혼인한 기별을 들은 후로는 넋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처럼 맘에 탐탁하게 믿었던 허숭의 맘이 그렇게도 쉽사리 변할 줄을 유순은 생각지 못하였던 것이다. 유순의 생각에 허숭은 이 세상에 가장 완전한 남자, 그러니까 가장 믿음성 있는 남자였다. 유순의 참되고 단순하고 조그마한 가슴은 오직 허숭으로, 허숭에게 대한 믿음과 존경과 사랑으로 찼던 것이다.

 

허숭이가 곧 유순의 하늘이요, 땅이요, 해요, 달이요, 생명이었던 것이다. 이 남자 저 남자 입맛을 보고 살맛을 보아, 물었다 뱉었다 하는 도회 신식 여성과 달라, 유순에게는 허숭은 유일한 남편이요, 남자였던 것이다. 허숭 이전에도 남자가 없고, 허숭 이후에도 남자가 없었던 것이다.

 

허숭의 맘이 변하여 다른 여자에게 장가든 것을 본 유순은 하늘, 땅, 해, 달, 목숨을 한꺼번에 잃어버렸다. 그가 조선의 딸의 맘을 그대로 지니지 아니하였다 하면, 그가 도회적, 이른바 신식 여자라 하면 울고 원망하고 미쳐 날뛰고 혹은 서울로 달려 올라가 허숭의 결혼식에, 또는 가정에 한바탕 야료라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유순은 가슴에 에이는 듯한 아픔을 품고도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듯한 태연한 태도를 가졌다. 그 부모나 형제에게도 괴로와하는 빛 하나 보이는 일이 없었다. 또 밤낮에 한가한 겨를이라고는 도무지 없는 유순은, 어느 으슥한 구석에서 맘놓고 슬퍼할 새도 없었다. 다만 하루 몇번 앞 들로 지나가는 기차 소리에 한번씩 긴 한숨을 쉬고, 시꺼먼 기차가 요란히 떠들면서 지나가는 것을 바라다볼 따름이었다.

 

여름이 되면, 방학 때가 되면 이 차에나 이 차에나 하고 허숭을 바라고 기다리던 그 버릇이 남은 것일까? 아직도 그래도 행여나 허숭이가 자기를 찾아올까 하고 바라고 기다리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