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숭은 안동 네거리에서 이건영을 만난 것을 연상하여, 얼른 이건영과 심순례와의 사이에 일어난 비극을 연상하였다. 그도 어디서 얻어들은 이건영과 은경과의 혼인말도 연상하였다. 그리고는 한 선생의 대답을 들을 필요가 없이 다 의문이 해결된 듯하였다.

 

허숭은 가슴에 무엇이 찔림을 깨닫고 이 자리에 있는 것이 합당치 아니함을 느껴 한 선생의 집에서 나왔다.

 

"유순!"

 

하는 생각이 허숭의 가슴을 찌른 것이다. 만일 자기가 정선과 혼인하는 것을 안다고 하면 유순도 저렇게 되지나 아니할까, 저보다 더한 비극을 일으키지나 아니할까 할 때에 허숭은 전율을 깨달았다. 허숭은 정처없이 발가는 대로 걸었다.

 

정신을 차린 순례는 한 선생 앞에 엎드려서 울기를 시작했다.

 

"순례!"

 

하고 한 선생은 손으로 순례의 어깨를 흔들었다.

 

순례는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선생님, 저는 어떡하면 좋습니까."

 

하고 물었다.

 

"큰 사람이 되지!"

 

하고 한 선생은,

 

"지금까지는 이건영이라는 사람의 아내가 되는 것으로 목적을 삼았지마는, 이제부터는 조선의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되기로 목적을 삼어.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아서 순례에게 소개한 것을 가슴이 아프게 생각하지마는, 그것도 다 순례를 큰 사람을 만들려는 하느님의 뜻으로 알고, 새로운 큰 길을 찾을 수밖에 없지 아니한가."

 

하고 한 선생은 잠시 말을 끊었다.

 

"그래도 제게는 너무도 견디기 어려운 아픔입니다."

 

하고 순례는 또 느껴 울기를 시작하였다. 순례의 어깨가 흔들리는 것을 볼 때에, 한 선생도 눈을 감아 눈에 맺힌 눈물을 떨어버렸다. 정란도 구석에 서서 울었다.

 

순례는 오랫동안 건영에게서 소식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알았고 또 여러 가지 풍설도 들었지마는, 그는 한 선생을 믿는 것과 같이건영을 믿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오늘 아침에 학교 동무로부터 이건영과 은경이가 오늘 저녁에 은경의 집에서 약혼식을 한다는 말을 들은 것이었다.

 

순례는 그저 울다가 돌아갔다.

 

"너 이 박사를 한번 만나 보련"?

 

하고 한 선생이 물으면 순례는,

 

"만나면 무얼 합니까."

 

하고,

 

"그러면 네 생각에는 어찌하면 좋으냐"?

 

고 물으면,

 

"어떡합니까."

 

할 뿐이었다.

 

순례의 말은 오직 눈물뿐이었다. 불완전한 말로는 이 짓밟힌 처녀의 가슴의 아픔을 도저히 발표할 수 없다는 듯하였다.

 

"그까짓 녀석을 무얼 생각하니"?

 

하고 그 어머니가 위로할 때에도 순례는 다만,

 

"그래두."

 

한마디를 할 뿐이었다.

 

"한번 만나 보고 실컷 야단이나 쳐 주렴."

 

할 때에도 그는,

 

"그건 그래서 무엇하오"?

 

할 뿐이었다.

 

순례는 이건영으로 하여서 받은 아픔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오직 제 가슴에 싸두고 혼자 슬퍼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밤중이면 제 방에서 일어났다 누웠다 부시럭거리는 양을, 그 부모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이 아팠다고 한다.

 

순례는 한 선생의 집에서 돌아오는 길로 이건영에게서 온 편지와 사진을 꺼내어 모두 불살라버렸다.

 

"그건 왜 살라버리니? 두었다가 증거품으로 그놈을 한번 혼을 내지."

 

하면 그는,

 

"그건 무얼 그리우"?

 

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혼자 울 뿐이었다.

 

순례가 돌아간 뒤에 한민교는 한참이나 괴로와하였으나, 마침내 모자를 쓰고 나가버렸다.

 

"아버지, 저녁 잡수세요."

 

하고 대문까지 따라나가서 묻는 정란에게 한 선생은,

 

"오냐."

 

하고 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