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를 지금까지 공부를 시켜 주시고, 또 일본 갈 여비까지 주시고, 또 따님과 혼인 말씀까지 하시니, 그 은혜를 무어라고 말씀할 수가 없습니다마는, 저같이 집 한 간도 없고 돈 한 푼도 없는 놈이 지금 혼인을 어떻게 합니까. 시험에 합격을 했댔자 곧 취직이 되는 것도 아니고…."
하고 숭은 거절하는 뜻을 표하려 하였다.
"그건 염려할 것 없지. 내가 그것을 모르는 배가 아니고, 그러니까 그것은 염려할 것 없고, 만일 내 딸이 맘에 안 들면 그것은 할 수 없지마는…나는 접때에도-인제 작년이지마는-말한 것과 같이 너를 자식같이 믿으니까. 아다시피 내가 나이 많고 집 일을 보살펴 줄 사람이 없거든. 사람이야 얼마든지 있겠지마는 어디 믿을 사람이 쉬운가. 또 정선이도 인제 이십이 다 되었으니 혼인을 해야지. 도무지 안심이 안 되어. 요새 이십이 넘도록 시집 안 가는 계집애들이 많지마는 어디 다들 믿고 맘을 놓을 수가 있다고. 나는 사람만 보지, 문벌이나 재산이나 도무지 보지 않어."
하고 윤 참판은 아버지로의 걱정, 재산가로의 걱정, 세상을 위한 걱정까지도 하여 가며 숭의 승낙을 구하였다.
숭은 한마디로,
"고맙습니다. 그러나 저는 따님과 혼인할 수는 없습니다. 제게는 유순이라는 여자가 있고, 또 저는 일생을 농촌에서 농민 교육 운동을 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따님과 혼인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따님과 혼인을 하며는, 첫째로 유순이라는 여자에게 대한 의리를 저버리게 되고, 둘째는 농촌에, 농민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게 됩니다. 저는 단연히 농민에게로 돌아가야 하고, 저를 믿고 기다리고 있는 유순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대답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숭의 인격의 명령이요, 양심의 명령이었다. 만일 이렇게 대답했다면 얼마나 갸륵하였을까.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숭에게는 그만한 용기가 없었다. 그의 눈 앞에는 서울에서도 미인으로 이름있는 정선이가 있지 아니하냐. 정선은 숭의 맘을 아니 끌지 아니하였다. 지금까지는 종과 상전과 같아서 평등의 지위에서 교제한 일은 없지마는, 이삼 년간 숭이가 이 집에 있는 동안에는 먼 빛에 가까운 빛에 볼 기회도 많았고, 인선이가 죽고 숭이가 이 집 살림의 대부분, 그 중에도 회계 사무를 맡은 뒤로부터는 숭과 정선이 마주서서 이야기할 기회도 없지 아니하였거니와, 정선의 옥 같은 살빛, 조그맣고 모양 있는 손, 무엇을 생각할 듯한 눈, 양반집 아가씨다운 기품, 그것은 울려 나오는 피아노 소리와 아울러 숭의 맘을 끌지 아니할 수 없었다-그러한 정선이가 있지 아니하냐. 게다가 그는 재산이 있다. 누구나 말하기는 정선에게는 삼천 석 이상이 돌아오리라고 한다. 그 어머니가 전주 친정에서 가지고 온 재산의 절반은 당연히 정선에게로 오리라고 한다.
어디로 보아 이 청혼에 거절할 이유가 있나. 숭은 속으로는 백번 승낙하였다. 그러나 숭은 무슨 말이나 한 마디 거절하는 말을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거절하는 말은 정말 거절이 아니 될 정도의 말이 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숭은 한참이나 말을 못하고 가만히 앉았다. 그는 고향에 있는 유순이를 생각하였다. 유순이가 옥수수 삶은 것을 치맛자락에 싸 가지고 아직 어두운 새벽에 정거장 길에 나와서 자기를 기다리던 것, 말은 못하면서도 자기의 가슴에 안기던 것, 자기가 그 등을 만지고 머리를 만진 것, <내, 내년에는 올께>하고 자기가 그에게 약속을 준 것과, 순진한 유순은 그 가슴에 자기의 모양을 그리고 기다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였다.
숭은 동경에 가서 고등문관 시험을 치르느라고, 또 서울 돌아와서는 성적 발표를 기다리느라고 구월이 되도록 고향에를 못 갔다. 유순은 얼마나 숭을 기다렸을까. 몇번이나, 아침 저녁으로 서울서 오는 차를 바라보고, 이번에나 이번에나 하고 기다렸을까. 만일 숭이가 윤 참판의 딸 정선과 혼인을 하여버린다 하면 유순은 얼마나 슬퍼할까. 얼마나 실망하고 울고 인생을 원망할까. 조선의 딸의 매운 마음으로, 혹은 물에 빠져 죽지나 아니할까. 그 뿐 아니라 숭 자신은 의리를 배반하는 것이 아닐까.
"또 농민에게 간다던 맹세는 어찌하나. 일생에 내 한 몸의 고락을 생각지 아니하고, 이 몸을 가루를 만들어서라도 불쌍한 농민-조선 민족의 뿌리요 줄거리 되는 농민을 가르치고 인도하여 보다 힘있고 보다 안락한 백성을 만들자던 맹세는 어찌하나. 한 선생과 여러 동지들에게 큰소리 하던 것은 어찌하나. 아니다, 아니다. 나는 윤 참판의 청혼을 거절하여야 한다. 그리고 유순과 혼인을 해 가지고 농촌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렇게 숭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러나 고개를 들어서 윤 참판을 바라볼 때에는 그러한 담대한 말이 나오지를 아니하였다.
"싱거운 일이다!"
하고 숭은 다시 생각을 돌려 본다.
"내가 유순과 약혼을 하였느냐. 그의 몸을 버렸느냐. 내가 유순에게 대하여 지킬 의리가 무엇이냐. 내가 유순을 사랑하는 것은 내 맘밖에 아는 이가 없고, 유순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유순의 맘밖에 아는 이가 없지 아니하냐. 하느님? 신명? 그런 것이 정말 있느냐. 있기로니 내가 유순에게 죄를 지은 것이 무엇이냐"?
또 숭은 이렇게 생각해 본다-
"유순은 좋은 여자다. 얼굴이나 몸이나 또 맘이나 다 든든하고 아름다운 여자다. 그러나 정선은 더 아름답지 아니하냐. 유순은 보통학교밖에 다닌 일이 없는 시골 계집애, 정선은 신식으로 구식으로 모두 다 컬처가 높은 서울 양반집 딸…."
하고 숭은 여기서 스스로 제 생각에 아니 놀랄 수 없었다. 왜 그런고 하면 평소에 갑진이가 시골, 서울, 상놈, 양반 하는 것을 비웃고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자기에게도 시골보다도 서울을, 상놈보다도 양반을 좋아하는 생각이 뿌리깊이 숨은 것을 깨달은 까닭이다.
"나와 같이 고등한 교육을 받고, 고등한 정신 생활을 하는 사람이"
하고 숭은 생각을 계속한다.
"일개 무식한 시골 여자하고 일생을 같이할 수가 있을까. 불만이 아니 생길까. 아니다! 도저히 불만이 아니 생길 수가 없을 것이다! 내가 유순과 혼인을 할 생각을 하는 것은 일종의 호기심이다. 실수다. 그것은 다만 나 자신을 불행하게 할 뿐이 아니라, 그보다도 더 유순이라는 죄없는 여자를 불행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 내가 나를 불행하게 할 권리는 있다 하더라도 남, 유순을 불행하게 할 권리는 없지 아니하냐. 그렇고말고!"
숭은 마치 큰, 무서운 꿈에서 깨어난 듯한 기쁨과 가벼움을 깨달았다. 이러한 분명한 진리를 어떻게 지금까지 생각지 못하였던가, 하고 앞이 환히 열림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농촌 사업은"?
하고 숭은 또 양심의 한 편 구석에서 소리침을 깨달았다. 그러나 숭의 머리는, 양심(?)은 마치 지금까지 가리워졌던 모든 운무가 걷힌 것같이 쾌도로 난마를 끊듯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었다.
"농촌 사업은 정선이하고 하지. 정선이야말로 훌륭한 동지요, 동료가 될 수 있는 짝이 아닌가. 아아,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
하고 숭은 한번 한숨을 내어 쉬었다. 가슴에 막힌 것이 다 뚫린듯이 시원하였다. 그리고 자기 전도가 백화가 만발한 꽃동산같이 보였다. 그의 양심, 의리감, 진리감, 이러한 것들은 그 분홍 안개 속에 낯을 감추어버리고 말았다.
"어서 대답해."
하는 윤 참판의 말이 떨어진 것을 다행으로 허숭은,
"그처럼 말씀하시니 저를 버리시지 아니하신다면 하라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분명히 승낙하는 뜻을 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