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 어느 날 아침. 허숭은 윤 참판의 심부름으로 예산에 가고 없을 때, 저녁 때나 되어 윤 참판이 내객 몇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 전보 한 장이 왔다.
"거 웬 전보냐."
하고 윤 참판이 물을 때에 문객은,
"기오수우, 기오수우."
하고 일본 말대로 그냥 읽었다.
"오, 허숭에게 왔구나. 이리 주게."
하여 윤 참판은 전보를 받아서 뜯어 보았다.
"고문 시험 본일 발표 귀하 입격."
이라고 하였다. 허숭은 고문 시험에 입격한 것이었다.
"응, 허숭이가 고등문관 시험에 급제했네그려."
하고 윤 참판은 자기 아들의 일이나 되는 듯이 몹시 기뻐하였다.
"허숭이가 누구오니까."
하고 어떤 객이 물을 때에 윤 참판은,
"내 사윌세, 사위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정선이 어디 갔느냐."
하고 노인은 안 대청을 바라보고 불렀다.
"아가씨 후원에 계십니다."
하고 계집 하인이 뒤꼍으로 뛰어 갔다.
윤 참판은 대청 안락의자에 앉아서 딸이 오기를 기다렸다.
정선은 학교 동창인 동무 두 여자와 함께 후원으로부터 돌아왔다. 정선은 형의 복도 벗어서 하늘빛 하부다이 남치마에 은조사 깨끼저고리를 입었다. 날은 구월이지마는 아직 더웠다.
정선의 두 동무는 윤 참판을 보고 경례하고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동무들과 같이 건넌방으로 들어가려는 정선을 불러 윤 참판은,
"숭이가 고등문관 시험에 급제했다는 전보가 왔다. 옛다, 보아라."
정선은 마지못하여 아버지의 손에서 전보를 받아 들고 읽었다. 건넌방에 있는 두 동무들은 정선을 향하여 눈짓을 하고 아웅을 하였다.
"잘 됐어요."
하고 그 전보를 탁자 위에 놓았다.
윤 참판은 정선의 표정을 보려는 듯이 빙긋 웃는 눈으로 정선을 보았다. 정선은 아무 감동도 없는 듯이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얘, 숭이가 누구냐"?
하고 한 동무가 정선의 귀에다 입을 대었다.
"누구는 누구야, 정선이 허즈번드이겠지."
하고 다른 동무가 코를 흥, 하였다.
"이 애는."
하는 정선은 코 흥 하는 동무의 콧등을 손가락으로 살짝 때렸다.
"그러냐. 네 서방님 될 사람이냐."
하고 귀에 대고 말하던 동무가 묻는다.
"아냐. 우리 집에 있는 학생야-고학생야."
하고 정선은 시들하게 대답하였다.
"오. 그, 저, 행랑에 있던 그 사람이로고나, 보성전문학교 학생"?
하고 한 동무가 눈을 크게 떴다.
"에"?
하고 코 맞은 동무가 놀란다.
"너 그 사람한테 시집가니"?
하고 또 한 동무가 눈을 크게 뜬다.
"이 애들은."
하고 정선은 몸을 뿌리친다.
그 날 저녁 차에 허숭이가 왔다.
"전보 왔다."
하고 윤 참판은 숭이가 인사도 다 하기 전에 서랍을 열고 전보를 꺼내어 숭에게 주었다.
숭은 그 전보를 받아 읽었다. 숭은 기뻤다. 그의 숨결은 높았다. 그것이 무엇이 그리 끔찍한 것이길래, 하면서도 역시 기뻤다. 숭은 팔백여 명 수험생, 전 일본에서 모인 수재 중에서 뽑힌 소수 중에 자기가 든 것이 기뻤다.
"갑진군은 어찌 되었습니까"?
하고 숭은 자기의 기쁨을 감추고 물었다.
"갑진이 아직 소식이 없다."
하고 윤 참판은 숭의 손에서 다시 전보를 받아 들었다.
"거기 앉어."
하여 윤 참판은 숭을 앉힌 뒤에,
"인제 고등문관 시험도 지났으니, 혼인 일을 작정해야지."
하고 혼인 문제를 꺼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