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순의 아버지 유 초시는 그 날 유순의 말을 듣고 분노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내일부터는 모내러 가지 말어라. 그러길래 내가 뭐라더냐, 굶어 죽기로니 내 딸이 논에 들어서랴고. 다실랑 가지말아. 도시 내 탓이다."

 

이렇게 유 초시는 분개하였다.

 

유순도 마음이 괴로왔다. 더구나 한갑이(기수를 때린 청년)가 자기 때문에 장차 일을 당할 것을 생각할 때에 미안하였다. 한갑이는 유순이를 사랑하는 청년으로, 그는 늙고 가난한 과부의 아들이었다. 유순은 한갑이가 자기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줄을 잘 안다. 그는 유순이가 보통학교에 다닐 적에 세 반이나 위에 있던 아이로서 학교에 매양 동행하였다. 개천을 업어 건네다 주는 일도 있었다.

 

한갑이는 말이 없고 진실하고 어떠한 괴로운 일이든지 싫다거나 하고 핑계하거나 앙탈하는 일이 없었다. 아직 나이 젊지마는 동네 어른들도 한갑이를 존경하였다. 이를테면 살여울 동네에서 제일 믿음성 있는 사람이었다. 문벌로 말하면 유순의 집에 비길 수가 없었다. 그의 아버지가 타관에서 어떻게 굴러 들어와서 이 동네에 살게 되었으나, 그 아버지는 벌써 죽은 지가 오래여서 유순은 그 얼굴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한갑이 어머니가 한갑이 하나를 길렀다. 남의 집 일을 해 주고, 겨울이면 길쌈을 하고-그 과부는 누구에게나 환영을 받는 이였다. 한갑이는 그 아버지보다도, 성질에 있어서는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 그 어머니도 말이 없고 부지런하고 믿음성이 있었다.

 

이러한 한갑이다. 그는 속으로는 유순이를 사모하건마는 감히 그 말을 유 초시에게 하지는 못하였다. 돈이 없고 문벌이 낮기 때문에, 유순의 오라범이 글자나 읽었노라고 도무지 일을 아니하고 술이나 먹고 돌아다니기 때문에 유순의 아버지는 집안에 어려운 일을 많이 한갑에게 부탁하였다. 이 집에 장을 보아 주는 사람은 한갑이었다.

 

이러한 한갑이를 죄에 빠뜨리게 한 것을 유순은 퍽으나 슬퍼하였다.

 

유순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물동이를 들고 물 길러 나갔다. 우물이 동네 서편 끝 정거장으로 질러가는 길가에 있기 때문에, 또 서울서 오는 새벽차가 여름에는 새벽 물 길러 갈 때에 오기 때문에, 유순은 여름이면 물 길러 우물에 나와서는 무너밋목을 바라보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행여나 허숭이가 오나 하고, 허숭은 벌써 서울 부자집 딸과 혼인을 해버렸지마는 그래도 유순의 이 버릇은 아직 빠지지 아니하였다. 우물 위에는 거미줄이 걸리고, 그 거미줄에는 눈물방울과 같은 이슬이 맺혀서 새벽 빛에 진주같이 빛났다. 마치 유순이가 첫물을 긷기 전에는 이 우물을 거룩하게 지키려는 것 같았다.

 

유순은 거미줄에 걸린 이슬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바가지로 그 거미줄이 상하지 아니하도록 물을 떠서 손에 받아 낯을 씻고 치맛자락을 수건삼아 썼다. 밤에 잠을 잘 못 잔 유순의 피곤한 낯에 찬 샘물이 닿는 것이 시원하였다.

 

유순은 물 한 동이를 길어 놓고 또아리를 머리에 이고 또아리 끈을 입에 물고 물동이를 이기 전에 무너미를 바라보았다. 아침 이슬에 목욕한 풀빛은 짙은 남빛이었다. 구름을 감은 독장이 높은 봉우리에는 불그레 햇빛이 비치었다. 오지 못할 사람을 아침마다 기다리는 유순의 가슴도 무거웠다.

 

유순은 휘유 한번 한숨을 쉬고 허리를 굽혀 물동이를 이려 하였다. 물동이에 엎어서 덮은 바가지 등에 푸른 메뚜기 한 놈이 올라 앉았다가 유순의 손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 뛰어 달아나서 이슬에 젖은 풀숲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유순이가 바로 물동이를 들어서 머리에 이려 할 때에 유순의 앞에는 양복을 입고 큰 슈트 케이스를 든 남자가 나타났다. 유순은 물동이를 떨어뜨릴 뻔하도록 놀랐다.

 

유순은 물동이를 든 채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 남자는 허숭이었다. 허름한 학생복 대신에 흰 바지 흰 조끼에 말쑥한 양복을 입은 것만이 다르고는 분명히 허숭이었다.

 

그러나 허숭인 것을 분명하게 본 유순은, 물동이를 이고 돌아보지도 아니하고 집을 향하여 걸었다.

 

남의 남편인 남자를 대해서는 이러하는 것이 조선의 딸의 예법인 까닭이었다.

 

"나를 몰라 보오"?

 

하고 허숭은 슈트 케이스를 이슬에 젖은 풀 위에 내어버리고 유순의 뒤를 빨리 따르며,

 

"내가 숭이외다."

 

하고 말하였다.

 

"네."

 

하고는 순은 여전히 앞으로 걸어갔다.

 

"아버지 안녕하시오"?

 

하고 숭은 다른 말이 없어서, 말을 하기 위해서 물었다.

 

"네."

 

하고 순은 여전히 외마디 대답이었다.

 

숭은 그만 더 따라 갈 용기를 잃어버리고 우뚝 섰다. 마치 장승 모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