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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어린애들이나 자라나야지, 혼자서 벌어서 숱한 식구를 살리자니 좀좀한가. 오만 세상에 우리처럼 곁이 없는 사람은 없을 거야. 사오 년을 그 고생해도 누구 하나 들여다보는 친척이 있나. 계봉이(막내아들) 낳고 사흘만에 쌀 꾸러 갔달밖에."
이 말은 아마 모르면 몰라도 벌써 열 번은 들었으리라. 그때마다 꼭 같은 음성과 꼭 같은 사설로 되씹고 또 되씹던 말이다. 그러니 너무 들어서 구찮은 것이야 물론이지.
그보다 같은 소리를 열 번, 스무 번, 또 앞으로도 무수히 들어야 할 그것과 그리고 무수히 외일 아내의 점액질(粘液質)이 찌끗찌끗하다.
아내는 남편에게 무슨 불만이 있든가 또는 남에게 무슨 앙치가 있으면, 그 날짜, 그 경위, 그 증인까지를 하나 빼지 않고 몇 번이든지 곱집어 외이고 사설한다. 그런데도 그것은 증오심으로 욕지거리하는 때는 아직 좋다. 그렇지 않고 비창해지는 때라든가 또는 나약해지는 때면 그 소리가 비리고 못생겨진다.
그런데 오늘 지금 아내가 하는 조는 그도 저도 아니고 딴에는 한가지 애교다. 사설은 열 번 듣던 그 소리 그대로이되 그 음성은 확실히 간드러져 보려는 청이다. 워낙 건강하고 덥덥스런 아내는 애교와 간드러진 목청에는 천은(天恩)이 없다.
그래서 거게다가 보고 들은 조로 다소 색채를 놓으려고 들면 얼른 듣기에는 하릴없는 신음 소리다. 그런 때는 응당 건강한 소리가 원수라는 듯이 비리고 뇌리치한 청을 내보는 것이다. 부드럽고 간드러진 음성을 용납할 줄 모르는 세괏은 건강이 때로는 원망스러우리라.
아내는 좀더 다정히 남편에게 묻는다.
"어디 몸이 아프오."
그러나 민우는 오줌을 누고 난 뒤처럼 몸을 한번 우두두 떨 뿐 - 그것은 아무렇지 않다는 대답도 되려니와 또 한편 몸이 저절로 아슬떼려지는 표이기도 하다.
따뜻한 가정이라는 말이 지금 세상에서는 벌써 자취를 감춘 지 오란, 수만 년 옛 일인 상싶다. 달과 같이 차고 수정과 같이 맑은 그 위에 이루어질 정열과 인정과 풍속은 없을까. 그러나 아내는 남편의 기분 여하를 알 까닭이 없다. 아니 좋거니 생각한다.
"계란 좀 잡숫고 자겠소?"
"아니 또 소화가 나쁜걸, 감기가 왔는지."
민우는 얼른 이렇게 대답하며 제 자리에 혼자 드러누웠다가 문득 생각이 들어 다시 일어나 솜보료를 집어다가 머리를 가리고 드러누웠다. 몸이 좀 불편하다는 표다. 그러나 그래 놓고도, 지금 바로 눈앞에서 무척 애교 있어지려 하고, 요사이 무슨 회리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서울 여편네들 옷매무새가 부러워나서 인조견 단속곳까지 해입은 아내를 생각하고는 또 한번 왕청되게,
"여보, 그런데 나 죽으면 임자 어쩔 테요."
이렇게 물어 놓고 다시 발을 달았다.
"암만해도 오래 살 상싶지 못해, 요새같이 버쩍 쇠약해져서는 아닌게아니라 몇 날 볕 못 보지."
오늘 밤 기분으로 말하면 민우는 이런 말 저런 말 하고 싶지 않았지만 삼십 전후의 피등피등한 아내를 잡념 없이 수이 자게 하려니까 자연 이따위 된서리를 아내의 건강 위에 던져두지 않을 수 없다.
"말을 해도 왜 해필 그따위 복 받지 못할 소릴 한단 말요. 죽긴 왜 죽어요. 숱한 잔잡을 버려 놓고 죽었으면 꼴 좋겠소."
아내는 제 몸이 떨려졌다. 민우의 말투는 모르면 몰라도 신수에 무척 화를 불렀으리라. 그는 지금 바로 보이지 않는 앙화가 남편의 머리를 향하고 내려오는 것 같았다.
"나 죽어도 살기야 살겠지."
민우는 그렇다고 푸시시해 버리기도 무엇해서 뒤를 한번 더 조져놓고 나서 말을 슬쩍 돌려,
"여보, 나 등뒤로 바람이 들어오니 이불 좀 꼭 눌러 주오."
하고 저편으로 돌아누워 그리고는 암말도 더 묻지 않는다.
아내는 자리에 누워서 한참 좋이 신문을 버서석거리더니 그럭저럭 잠이 든 모양이요, 민우는 초저녁에 한잠 자고 난 탓인지 아닙때까지 이불 속에서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다.
민우는 아침에 어린애들 떠드는 소리에 눈이 띄었으나 보료 속에 얼굴을 파묻은 대로 있었다.
그는 떠들썩하는 어린애들 소리를 읽으면서 한 놈씩 성격을 생각해 본다.
맏놈은 그저 순하다. 맏이 치고 얼뜨기 아닌 것이 없다는 속담을 생각한다. 그러나 음식 덜 먹고 말없는 것이 좋다. 둘째 놈은 성미가 팩하다. 재주 있다. 하나 그보다 자존심이 강한 것이 좋다. 셋째 놈은 역시 순하나 울컥이다. 비위성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