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우는 바로 관찰소 전촌 씨를 찾아갔다. 그는 매우 반가운 낯으로 취직은 전부터 말이 있던 창고회사에 거의 확정이 되었으나 자네 일이니만치 남보다 돈 좀 더 받게 하려고 지금 교섭중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요새는 물가가 비싸지고 또 민우 집 식솔이 여느 사람 집보다 많으니까 소불하 오십 원은 굳겨 준다는 거다.

            민우가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긴다는 뜻으로 녜녜 대답만 하고 돌아오려는 때에 역시 전촌 씨 소개로 도청 사회과에 취직한 박의선이가 카키빛도 새로운 쓰메에리 양복을 입고 늠름히 들어온다. 본시 친밀한 사이일 뿐 아니라 그 사람이 그전에 그 안에 있을 때에 민우가 서적이니 지리가미니 하는 것을 넣어 주었고 또 그 사람도 민우가 그 안에 있을 때에 편지와 서적 차입을 자루 해주었던 것도 물론이다.

            그런데 하도 오래간만이어서 그런지 두 사람은 잠시 서로 얼굴을 붉히고 몇 마디 바꾼 담에 민우가 먼저 돌아서 나왔다.

            나올 때에 얼른 본 박군의 왼편 뺨 모습이 이상스레 눈밑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깜박 그 생각을 잊었는데 별안간 무엇이 머릿속에서 번쩍한다.

            "옳지, 꼭 그의 아버지 모습이야."

            사람은 어쨌든 나이 먹으면 그 부모 모습을 나타내는 건가 보다고 민우는 생각하였다. 알은 작지만 그 씩씩하고 연설 잘하기로 이름난 박군도 어느새 늙었구나 싶었다. 그리하여 박군도 그렇게 서로 싸우던 그 아버지의 모습으로 차차 변하여 가는 것이라 생각하니 사람의 일이란 실로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다.

            그때 같아서는 박군과 그 아버지는 짜장 물과 불로 서로 그 일생을 마쳐 버릴 것만 같더니만 듣자니 지금은 그 아버지는 사남매 중에서 박군을 제일 사랑 - 사랑이라는 것보다도 요새는 명색이 그렇지 않아서 은근히 존경하는 터이라 한다.

            민우는 뜻하지 않고 늙어죽을 그때를 생각하였다. 아직 그때까지는 삼사십 년이 남아 있는데, 지난 삼십 년 동안에도 그만치 헤아릴 수 없이 세사는 변하고 또 변했은즉 장차 앞으로 올 그 시간은 또 얼마나한 변천을 남겨 줄 것이랴. 실로 몸소름나는 일이다.

            그는 또 뜻하지 않고 관 속에 가로누운 자기를 생각하였다. 그 관 뚜께 위에 먹으로만 쓴 글씨 - 민우의 약력이 나타난다. 그 담에는 주묵글씨 또 그 담에는 백묵글씨… 이렇게 수없이 바뀌어진다. 그러다가 이 가지가지 빛깔 글씨가 얼룩덜룩 섞여 쓰인 것이 보인다. 그는 또 한번 몸소름을 친다. 차라리 관 뚜께에 아무 것도 씌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

            그는 산에 올라가서 움푹하고 향양한 남역바위에 기대어 가지고 간 책을 한참 좋이 읽다가 거리에 내려와서 신문지국에 들러 요 며칠 동안의 신문을 대강 춰본 다음 책사에 들렀다가 석양편에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쪽박 깨는 소리를 하며 울상을 하고 있다. 알고 보니 막냇놈이 이웃 아이들과 장난질을 하다가 길바닥에 넘어져서 무르팍을 벗긴 것이다.

            "어느 놈의 새끼가 떠밀어 놨는 게지, 글쎄 이 피나는 걸 봐요."

            그래도 민우는 잠시 암말이 없다.

            "맨 무릎 고드리가 돼서 쉬 낫지 않을 건데… 내복이 다 떨어진 걸 입었으니 다칠밖에…."

            민우는 또 한번 일부러 잠잠해 본다.

            "어쩌면 우리 집 애들만 밤낮 다친단 말이냐, 온."

            그제사 민우가 무중 툭 쏘아붙인다.

            "거기 약 가져와."

            아내가 어정어정 책궤를 드비더니 무슨 약병을 꺼내 왔다.

            "이거 뭐야, 소독부터 해야지."

            그러나 아내는 어느 건지 찾지 못하고 잠시 망설이고 있다.

            "거, 붉은 물약을 가져와, 다친 데 만수나 부르고 있으면 되나."

            아내는 성이 났는지 아까보다도 더 어물어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