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부터 어학 공부를 시작한 연실이는, 오월쯤엔 제법 히라가나로 적은 <심상소학독본> 삼 권쯤은 읽을 수 있도록 진척되었다. 비교적 기억력이 좋은 연실이요, 그 위에 어서 배워야겠다는 독이 있느니만치 어학력이 놀랍게 진척되었다. 삼권쯤부터는 선생이 벌써 알지 못하여 쩔쩔매는 데가 많이 있었지만, 어떤 때는 선생보다 연실이가 뜻을 먼저 알아내곤 하였다.
그 어떤 날이었다.
본시의 빛깔도 깜퇴퇴하거나 아직 피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반질하게 검게 된 얼굴을 선생의 가슴 앞에 디밀고 앞 뒤로 저으면서 독본을 읽고 있던 연실이는, 문득 선생의 숨소리가 괴상하여가는 것을 들었다.
연실이는 눈을 들어 선생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까도 선생이 술먹은 줄은 몰랐는데, 지금 그의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이 점을 연실이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순간에 선생의 얼굴에는 싱거운 미소가 나타나며 팔을 펴서 연실이의 어깨를 끌었다.
연실이는 선생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순간에 직각하였다. 끄는 대로 끌리었다.
그날 당한 일이 연실이에게 정신상으로는 아무런 충동도 주지 못하였다. 그것은 연실이가 막연히 아는 바, 사내와 여인이 하는 노릇으로, 선생은 사내요 자기는 여인이니 당하게 되면 당하는 것이 당연한 일쯤으로 여겼다.
그때 연실이가 좀 발버둥이를 쳐 반항을 한 것은, 오로지 육체적으로 고통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이런 고통을 받으면서 그 노릇을 하는 것이 여인의 의무라 하는 점이 괴로왔다.
곧 다시 일어나서 아까 하던 공부를 계속하고 있는 양을 사내는 누워서 번번히 바라보고 있었다.
좀 있다가 동무의 동무(이 집 주인 기생)의 방에 건너가서 체경을 보고 그는 비로소 약간 불쾌를 느꼈다. 아침에 물칠하여 곱게 땋아늘였던 머리의 뒷덜미가 헝클어진 것이었다.
이 사건에 아무런 흥미나 혹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연실이는, 이튿날도 여전히 공부하러 사내를 찾아갔다. 그날 또 사내가 끌어당길 때에 문득 어제 머리 헝클어졌던 것이 생각이 나서,
“가만, 베개 내려다 베구요.”
하고 베개를 내려왔다.
그 뒤부터 사내는 생각이 나면 베개를 내려오라고 하곤 하였다. 정 귀찮은 때가 아니면 연실이는, 대개 베개를 내려왔다. 공부에 피곤하여 좀 쉬고 싶은 때는 스스로 베개를 내려오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사내와 여인이 때때로 하는 일이어니쯤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연실이는, 염증도 나지 않는 대신 감흥도 얻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 느낀 바 육체적 고통이 덜하게 되었으므로, 직전에 느끼는 공포의 긴장이 덜하게 된 뿐이었다.
연실이에게 말하라면 사람이 대소변을 보는 것은 저마다 하는 일이지만, 남에게 보이기는 부끄러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일은 좀더 대소변보다 비밀히 해야 하는 일이지만, 저마다 하는 일쯤으로 여기었다. 남에게 보이고 더우기 언젠가 제 아버지와 소실이 하던 꼴대로 추잡히 노는 것은 더러운 일이지만, 비밀히 하는 것은 대소변쯤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연실이는 연하여 그 선생에게 다녔다. 이제는 더 가르칠 만한 것이 그 선생에게는 없었지만, 습관적으로 그냥 다닌 것이었다. 선생은 베개를 내려놓는 맛에 그냥 받았다.
그냥 어학을 배우는 한편으로 집에서는 돈 거간의 출입에 늘 주의를 가하고 있던 연실이는, 그해 가을 어떤 날, 적지 않은 돈이 어머니의 손으로 들어온 것을 기수채었다.
옷이며 짐은 언제라도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해두었던 연실이는, 그날 밤 큰방에 들어가서 어름어름하다가 어머니가 변소에 간 틈에 농문 안에 허수로이 둔 돈 뭉치를 꺼내어, 방망이질하는 가슴을 부둥켜안고 자기 방으로 건너와서, 저녁때 몰래 준비했던 작다란 가방을 보자기에 싸 가지고 발소리를 감추며 집을 나섰다.
한 시간쯤 뒤에는 부산으로 가는 직행 열차에 연실이의 작다란 몸이 실리어 있었다.
아무 애수(哀愁)도 느끼지 않았다. 가정에 대하여 아무 애착도 없던 그는, 집을 떠나는 것도 서럽지도 않으며, 어려서부터 남을 의뢰하는 습관이 없이 자란 그는, 낯설고 말 서투른 새 땅에 가는 데도 일호의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그런 성격이었는지 혹은 그의 환경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인간 만사에 감동과 흥분을 느낄 줄을 모르는 연실이는, 아무 별다른 감상도 없이 평양 정거장을 떠난 것이었다.
‘혹은 이것이 영결일지도 모르겠다.’
가정에 대하여 애착이 없고 장차 사오 년은 넉넉히 지낼 여비를 몸에 지닌 그는, 이번 떠나면 장차 영구히 이 땅에는 다시 올 기회가 없을 듯싶어서 도리어 내심 시원하였을 뿐이었다.
김연실전 - 5. 감동과 흥분을 모르는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페이지 10 / 전체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