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이 년의 진명학교 생활은 결코 기다란 세월이랄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이 년이라는 날짜가 연실이에게 일으킨 변화는 적지 않았다.
학교에서 배운 바의 지식이라는 것은 보잘것이 없었다. 회도몽학(繪圖蒙學)을 제이권까지 떼어서 쉬운 한문 글자를 배우고, 산술은 일찌기 집에서 자습한 분수에까지 다시 이르고, 지금껏 뜻은 모르고,
“당기우기 삼천 리에 도엽지로세,”
하며 부르던 노래가 사실은,
“단기위고 삼천 년의 도읍지로세,”
하는 것으로 단군, 기자, 위만, 고구려의 삼천 년간의 도읍지라는 '평양가'의 일절이라는 것을 알고,
“지금까지는 우리 조선에서는 여자라는 것은 노예로 알았거니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개명한 세상에서는 여자도 사회에 나서서 일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하고 사자후하던 진명학교 창립 선생의 말로써, 노예(뜻은 모른다)이던 여자가 교육 받게 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 등등, 학교에서 직접 얻은 지식보다도 그의 학교 생활 때문에 생겨난 성격의 변화와 인식의 변화가 더욱 컸다.
규칙 없이 순서 없이 너무도 급급히 수입한 자유사상 아래서 교육 받으며, 진명학교 학우들 틈에서 자라는 이년간에, 연실이의 마음에 가장 커다랗게 돋아난 싹은 반항심이었다. 학우들이 대개가 기생의 자식이라, 가정적 훈련과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유로이 자라난 이 처녀들은, 부모를 고마워할 줄을 모르고 부모를 공경할 줄을 몰랐다.
이 처녀들의 어머니가 자기네의 집안에서 하는 행동이며 말이며 버릇은 결코 자식에게 존경을 받을 만한 바가 못되었다. 이런 가정 아래서 부모를 공경할 의무를 모르고 자란 이 처녀들은, 따라서 부모(부모라기보다 아비 없는 어미만이 대개였다)를 무서워할 줄을 몰랐다.
어려서부터 부모 사랑은 몰랐지만 부모 무서운 줄은 알면서 자란 연실이는 그것은 처음은 의외였다. 그러나 이년간을 그 처녀들과 함께 지내며 가정이 재미 없으니만치 하학한 뒤에도 동무들의 집에 놀러가서 온 낮을 보내고 하는 동안, 어느 틈에 언제 배웠는지 모르지만, 연실이도 부모에게 대한 공포심을 잃고 그 대신 경멸심을 배웠다.
관념과 인식상의 이런 변화가 드디어 행동으로 나타나는 날이 이르렀다.
한 이 년간 학교에 다닐 동안 연실이는 어머니와 얼굴을 대할 기회가 몇 번이 되지 못하였다. 그전만 같으면 얼굴 보이기만 하면 무슨 트집으로든 반드시 꾸중을 하곤 하였는데, 한 이 년간 늘 학교에 다니면서 밤 이외에는 거의 집에 있을 기회가 없었던 연실이는, 따라서 어머니에게 꾸중들을 기회도 없었다.
이년 동안을 꾸중 안 듣고 지나서 열두 살이라는 나이가 되니, 아직 줄곧 대두고 꾸중을 하면서 지내왔으면 그렇지도 않았겠지만 어머니도 이제는 꾸중만 하기가 좀 안되었는지, 전보다 꾸중의 도수가 적어졌다. 단지 서로 차디찬 눈으로 대하곤 하는 뿐이었다.
그런데 어떤 날(그것은 연실이가 학교를 그만둔 지 만 일년쯤 되었다), 연실이는 동무이던 어떤 계집애의 집에 놀러갔다가 그곳서 불쾌한 일을 보았다. 불쾌한 일이라야 계집애들 특유의 일종의 시기일 따름이었다. 그때 마침 그 동무 계집애는 자기의 동무와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연실이가 오는 것을 보고 입을 비죽거리며 이야기를 멈추어버렸다.
이 기수를 챈 연실이는 불쾌한 낯색으로 앉아 있다가 드디어 제 동무에게 따져보았다. 따지다가 종내 충돌되었다. 이 엠나이(계집애) 저 엠나이 하면서 맞잡고 싸우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잔뜩 독이 올라서 제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이 마침 연실이의 집의 청결날이었다. 머리에 수건을 동이고 청결을 보살피고 있던 어머니가 연실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핀잔주었다.
“넌 옛날 같으문 시집가게 된 년이 밤낮 어델 떠돌아다니니? 이런 날은 좀 집에 붙어서 일이나 하디. 대테 어데 갔댔니?”
여느 때 같으면, 이런 꾸중이 있을지라도 연실이는 못 들은 체하고 방으로 들어가버릴 것이다. 그러나 이날은 독이 오를 대로 올라서 집에 들어선 참이라, 어머니에게 대꾸를 하였다.
“그러기에 일찍 왔디요.”
독 있는 눈초리와 독 있는 말투였다. 어머니가 벌컥 성을 내었다.
김연실전 - 2-1. 공포심을 잃고 경멸심을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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