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전 해에 소학교에 입학한 오라비동생의 학과 복습을 보살펴주다가 저절로 아라비아 숫자를 알게 되면서 어느덧 오라비보다 앞서게 되어, 오라비는 학교에서 가감을 배우는 동안, 연실이는 승과 제도 넘어서서 분수(分數)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신학문에 취미를 갖게 한 첫째 원인이었다.

둘째로 그가 학교에 가고 싶게 된 동기는 그의 가정 사정이었다.

연실이의 아버지가 과거의 영문 이속(吏屬)이라 하나, 다른 이속들보다 지체가 훨씬 떨어졌다. 다른 이속들은 대대로 이속 집안이든가, 혹은 서북 선비의 집안 후손으로, 여러 대째 내려오는 근본 있는 집안이었지만, 연실이의 아버지는 그렇지 못하였다. 연실이의 할아버지는 군정(軍丁)이었다. 군정 노릇을 하며 상관의 비위를 맞추어서 돈냥이나 장만하였다.

그 장만한 돈으로 아들을 위하여 영리의 자리를 사주었다. 얼마 전만 하여도 군정의 자식이 아무리 돈이란들 영리 자리를 살 수 있으랴만, 그때 마침 유명한 M감사가 평안감사로 내려온 때라, M감사에게 돈만 바치면 아무것이라도 할 수 있었던 시대였더니만치, 감히 바라도 보지 못할 자리를 점령한 것이었다.

목적은 치부(致富)에 있었다. 몇 해 잘 어름거려서 호방(戶房) 자리만 하나 얻으면 몇십만 냥을 모으기는 여반장인 시대라, 호방을 목표로 영리의 자리를 샀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김 영찰이 호방에 오르기 전에 일청전쟁이 일어나고, 일청전쟁의 뒤에는 관제 변혁으로 김 영찰 평생의 꿈이 헛데로 돌아갔다.

이렇게 되매 김 영찰의 입장은 딱하게 되었다. 평양서는 그래도 지벌을 자랑하는 가문에서 김 영찰을 군정의 자식이라 하여 천시하였다. 그러나 김 영찰로 보자면, 자기의 아버지는 여하컨간에 관속이었더니만치 아버지 시대의 동료들과는 사귀기를 피하였다. 개밥의 도토리와 같이 비어져나왔다.

만약 이런 때에 김 영찰로서 조금만 눈을 넓게 뜨고 보았더면, 자기의 장래를 상로(商路)든가 혹은 다른 방면에서 발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선조 대대로 군정 노릇을 하였고, 그 자신은 관리로까지 출세를 하였다가, 관리로서 충분히 자리도 잡아보기 전에 다시 앞길을 잃어버린 사람이라, 관료적 심정과 및 권력에 대한 동경심이 마음에 불타올라서, 다른 방면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여기서 김 영찰은 새로운 정세 아래서의 관리 자리를 얻어보려고 동분서주하였다.

이런 계급과 이런 사상의 사람의 예상사로 김 영찰은 첩 살림을 하였다.

더우기 몇 해 전만 하여도 기생들은 김 영찰을 군정의 자식이라 하여 속으로 멸시를 하였는데, 이즈음 그런 관념이 타파된 위에, 기생으로 볼지라도 예전과 달라, 행랑집 딸 술집 계집애들이 수심가깨나 하게 되면 함부로 기생이 되어, 기생의 지위가 떨어지기 때문에 누구를 괄시하든가 할 수는 없이 되어, 김 영찰 같은 사람은 이런 사회에서,

“어이, 내가 M판서 대감이 평양감사로 내려오셨을 적에, 어어…”

하며 호기를 뽑을 수 있는 고귀한 손님쯤으로 되어서, 화류계의 중심 인물쯤 되었다.

이런 가장에게 매어달린 그의 가정은 냉락한 가정이었다.

이 가정 안에서 연실이를 사랑할 수 있고 또 사랑할 의무를 가진 사람은 오직 그의 아버지뿐이어늘, 아버지라는 사람이 집에 들어오는 일조차 쉽지 않으니, 연실이는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랄 수밖에 없었다.

연실이의 적모(嫡母) - 민적상으로는 생모 - 는 군정의 며느리로 온 사람이니만치 교양 없이 길러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시집을 왔으면 남편에게라도 교양을 받아야 할 것인데, 남편 역시 그렇고 그런 사람이라 아내를 가르친다든가 할 만한 사람이 못되었다.

군정의 며느리로 시집온 것이 운수 좋아서 영찰의 아내가 되었다고 교만만 잔뜩 가지게 된 사람이었다.

사사에 연실이를 꾸짖었다. 잘못한 일은 둘째 두고 잘한 일이라도 꾸짖었다. 꾸짖는 때는 반드시,

“제 에미년을 닮아서…”

“쌍것의 새끼는 할 수 없어!”

하는 말 끼우기를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