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소생 자식들을 책할 때도,

“쌍것의 새끼하구 늘 놀아서 그 꼴이란 말이냐?”

하고 연실이를 끌어대었다.

이런 어머니의 교육 아래서 자라는 연실이의 이복동생(사내 둘과 계집애 하나)들이라, 동생들이 제 누나 혹은 언니에게 대해서 취하는 태도도 자기네는 양반이요 연실이는 쌍것이라는 관념 아래서 출발한 것이었다.

이런 가정 안에서 이런 환경 아래서 자라나는 연실이는, 어린 마음에도 온갖 사물에 대한 반항심만 성장되었다.

아무 애정도 가질 수 없는 아버지는 단지 무시무시한 존재일 뿐이었다. 게다가 적모에게 흔히 듣는 바,

“그 낫살에 계집이라면 정신을 못 차리는 더러운 녀석!”

일 뿐이었다.

적모며 적모 소생의 이복동생들에게 대해서 애정이나 존경심을 못 갖는 것은 거듭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뿐 아니라, 자기가 갓났을 때에 저 세상으로 간 자기의 생모에게조차 호의를 가질 수가 없었다. 이런 환경의 소녀로서 가슴에 원한이 사무칠 때마다 생각나는 것은 자기의 생모이겠거늘, 표독하게도 비꼬여진 연실이의 마음은,

‘왜 그것이 화냥질을 해서 나까지 이 수모를 받게 하는가?’

하는 원망이 앞서서, 도저히 호의를 가질 수가 없었다. 부계(父系)로 보아 양반(?)의 자식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싶은데, 그것을 방해하는 모계(母系)가 저주하고 싶었다.

이렇게 가정적으로 정 가는 데도 없고 사랑 붙일 데도 없는 연실이는, 어떤 날 자기 이모 - 노기(老妓) - 의 집에 놀러갔다가, 진명학교라는 계집애 학교가 있단 소식을 듣고, 열 살 난 소녀로서 부모의 승낙도 없이 입학 수속을 하여버린 것이다.

물론 부모에게 알리면 한번 단단한 경을 칠 줄은 번히 알았지만, 경에 단련된 연실이는 그것이 그다지 무섭지도 않았거니와, 두고두고 그 집에 박혀 있느니보다는 한번 경을 치고라도 학교에 다닐 수만 있었으면 다행이었다.

그랬는데 요행히도,

“제 에미를 닮아서 간도 큰 계집애로군. 사내로 태어났더면 역적 도모하겠네.”

하는 독 있는 욕을 먹은 뒤에 비교적 순순히 승낙이 되었다. 아마 어머니로서도, 집안에서 만날 보기 싫은 상년을 보느니보다는, 낮만이라도 학교로 정배를 보내는 것이 속이 시원하였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진명여학교도 창립한 다음 해에는 도로 문을 닫아버리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 학교의 창립자는 당시 이름높던 청년 지사였다. 그 창립자가 바야흐로 개화의 물결에 타고 오르려는 서북 조선 각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유세(遊說)하여 구하여들인 기금이 차차 학교 경영의 기초를 든든히 할 가망이 보였으나, 사위 사정의 급변화는 이 청년 지사로 하여금 자기의 사업에 정진치 못하게 하여, 그는 자기가 나고 자라고 한 땅을 등지고 멀리 해외로 망명을 하였다.

그가 외국으로 달아날 때에 고국에 남기고 간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의 노래가 온 조선 방방곡곡에 퍼지게 된 때쯤은, 진명여학교는 창립자의 후계자인 어떤 여사(女史)가 애써 유지하여보려고 노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문을 닫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쓸쓸한 가정에서 한때 자유로운 학원에 몸을 피하였던 연실이는, 다시 가정에 들어박히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때 연실이는 열두 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