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물레바퀴는 쉬임 없이 돌아간다. 한눈팔기만 하면, 한 걸음 절룩하기만 하면, 시대는 그 위를 용서 없이 타고 넘어서, 정신 차릴 때는 벌써 까마득한 앞에 달려가 있다.

연실이가 패밀리 호텔에서 유봉이와 연애에 골몰한 일년을 지내고, 다시 인간 세계에 나와서 둘러볼 때는(그 사이가 단 일년의 짧은 기간이나마), 조선의 사회도 적지 않게 변하였다.

문사(文士)의 수효가 놀랍게 많아졌다. 한 십여 일 J의 하숙에 몸을 기탁하고 있다가 성 밖(府外) 어느 조용한 늙은 과부의 집에 방 하나를 얻고 자리를 잡자, 유명 무명의 문사들이 육속하여 연실이를 찾았다. 새 총독의 문화정치의 여덕으로 적잖은 신문 잡지가 발간이 되어서, 지면(紙面)은 많아졌으나 집필자가 부족하여, 무슨 글이든 생기기만 하면 활자화(活字化)되는 문사 대량 산출의 시절이었다.

주판을 던지고 곡괭이를 던지고, 운전 핸들을 던지고 인력거 채를 던지고, 중학교 제모를 벗어던지고. 포승을 던지고 - 모두들 붓을 잡았다. 시, 소설, 수필, 온갖 형식의 문학이 놀라운 수효로 생겨나서 백화난만의 형태였다.

조선 신문학의 초창자인 이고주(李古周)가 문예라는 다분히 선전력을 가진 무기를 들고 처음 창도(唱道)한 것이 자유연애 찬송이었는지라, 신문학도들이 첫번 출발하는 자리는 천편일률로 '연애'였다. 연애소설, 연애시, 연애수필, 무릇 옛날에 있어서 '자왈(子曰)'이 없으면 글이 성립 못된다는 관념에 대신하여, '연애'가 포함되지 않은 글은 존재할 수 없다는 새 공식이 생겼다.

먼저는 최명애의 집에 그 뒤를 김유봉의 품에, 이렇듯 감추여서 공개되지 않았던 '다정다한한 여류작가 김연실'의 공개는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마치 저자와 같이 연실이의 집은 늘 청년 문학도들로 우글우글하였다.

그 어떤 날, 그날도 사오 명의 청년 문학도들이 연실이의 살롱(그들은 이 집 마루를 살롱이라고 불렀다).에 모여서 잡담들을 하던 끝에, 그 가운데 안경 쓰고 얼굴 창백한 친구가 연실이를 찾았다.

“미스 연(그들은 이렇게 연실이를 부른다), 여류문사 친목회를 조직해보시지요?”

“글쎄요.”

연실이는 얼굴에 썩 점잖은 미소를 띠고 대답하였다. 그 표정은 근일 거울과 의논하여가면서 수득한 것이었다.

“누구 어디 사람이 있어야지요.”

사실 만록총중의 일점홍으로 연실이 자기밖에는 여류문사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

이연실이의 의향에 창백한 청년이 반대의 뜻을 보였다.

“왜요, 많진 못하지만 몇 분 되시지요.”

“누구 누구?”

“저 최명애 씨라구 모르세요? 전 고창범 씨 부인…”

“네, 알기는 알지만…”

알기는 아나 최명애가 문사라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연실이는 의아하여 반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 쓴 게 있읍니까?”

“예, 아마 - 있지요.”

그리고 곁의 뚱뚱한 친구를 돌아보았다.

“K군, 최명애 씨가 언젠가 「×××」에 뭘 썼지?”

“그렇지. 아, 아니야. 「×××」이 아니구 「**」창간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