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실이가 친구 최명애의 집에서 뛰쳐나와서 문학청년 김유봉이 묵어 있는 패밀리 호텔을 숙소로 한 다음, 한동안은 연실이에게 있어서는 과연 즐거운 세월이었다.

첫째로 김유봉의 연애하는 태도가 격에 맞았다. 아직껏 김연실이라는 한 개 여성을 두고 그 위를 통과한 여러 남성이, 첫째로는 열 다섯 살 난 해에 그에게 일어를 가르쳐주던 측량쟁이에서 시작하여, 농학생 이모며 그밖 누구누구 할 것 없이 모두 평범한 연애였다.

연실이가 읽은 많은 소설 가운데 나오는 그런 달콤하고 시적(詩的)인 연애는 불행히 아직 경험하지 못하였다. 여류문학자로 자임하고, 문학과 연애는 불가분의 것으로 믿고 있는 연실이에게는, 그런 평범한 연애는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문학자인 이상에는 연애는 해야 하겠고, 다른 신통한 상대자는 나서지 않아서 부득불 불만족하나마 그 연애로 참아온 것이지, 결코 만족한 바가 아니었다.

그 유감이 김유봉으로 비로소 만족하게 해결이 된 것이었다. 달밤의 산보, 꽃 아래서의 속살거림, 공손히 바치는 꽃다발, 무수한 '아아'와 '어어'의 감탄사, 그 가운데서 미소로써 그를 굽어보는 자기를 생각할 때는 연실이는 만족감을 금할 수가 없었다.

자기를 에워싸고 모여드는 청년들도 연실이를 만족케 하였다. 청년들이라 하는 것이 죄다 명애의 집에 드나드는 그 무리였지만, 연실이가 명애의 집에 있을 동안은 명애가 여왕이요, 연실이는 한 배빈에 지나지 못하였는데, 패밀리 호텔에서는 연실이가 유일한 여왕이요 중심 인물이며, 뭇 청년은 그를 호위하는 기사였다.

조선으로 돌아올 때에 그가 품었던 커다란 포부 - 첫째로는 연애를 죄악으로 아는 우매한 조선사람의 사상을 타파하고(연실이는 이것이 문화의 제일보요, 여성 해방의 실체라 믿었다), 둘째로는 연애의 실체물인 문학을 건설하고, 세째로는 이리하여서 조선 여자의 수준을 세계적으로 올리려는 이 대이상(大理想)은 착착 진척되는 듯이 믿었다.

이러한 가운데서 때때로 그로 하여금 불안을 느끼게 하고 초조한 생각을 느끼게 하는 것은, 즉 자기 자신의 지식 정도에 대한 의혹이었다.

뭇 청년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논쟁하는 이야기가 연실이에게는 알아듣지 못할 말이 퍽이나 많았다. 토론의 내용, 토론의 의의, 토론의 주지만 이해키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아니, 주지 내용에 대해서는 태반이 모를 것뿐이었지만, 심지어 그들이 토론하는 이야기의 말귀도 알 수 없는 것이 많았다.

그들의 이야기 가운데 어떤 것을 무슨 형용사로 알고 듣고 있노라면 사람의 이름인 수도 있고, 낯설은 말을 누구의 이름인 줄 알고 듣고 있노라면 나중에 그것이 무슨 주의(主義)의 외국말인 수도 있고, 요컨대 이 나라 말 저 나라 말이며, 학술상의 술어(術語)며 고유명사를 막 섞어가면서 토론하는 그들의 이야기는, 연실이에게는 거의가 알아듣기 힘든 것이었다.

같은 선각자로서 더우기 만록총중의 일점홍으로 이 그룹의 중심이 되는 연실이라, 그 입장으로도 침묵만 지킬 수가 없거니와, 그의 자존심으로도 때때로 말을 끼어보고 싶고, 더우기 뭇 청년들은 연실이에게 듣기기 위하여 더 기써서 토론을 하는지라, 자연히 연실이는 말을 참견치 않을 수가 없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 몇 번은 참견을 하여보았다. 참견하였다가 멋없이 움쳐진 일이 여러번 있었다. 공연한 맞장구를 치다가 머석해진 적도 적지 않았다. 연실이 자신도 무료해서 딴 말로 돌리고 하였지만, 그들도 민망해서 좌석이 싱겁게 되고 하였다.

그런 일을 누차 겪은 뒤부터는 연실이는 퍽 주의해서 그들이 연실이 모르는 토론들을 할 때에는, 연실이는 편물을 한다든가 독서를 한다든가 그런 시늉을 해서 개입할 기회를 피하고 하였지만, 마음으로는 일말의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망신스럽다는 일 자체도 불안하거니와, 조선의 여류 문학가요 선구자로 자신하고 있는 자기가 그렇듯 모르는 말이 많다는 점이 불안스러웠다.

이러한 가운데서 김유봉과 공동생활의 일년이 지났다. 일년이 지나고는 김유봉과 갈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