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대전쟁의 여파가 온 세계에 가지가지로 일어나는 가운데, 자유주의 나라인 미국이 던진 몇 개가 꽤 세계를 소란케 하였다.

가로되 국제연맹, 가로되 민족자결주의, 가로되 무엇, 가로되 무엇….

이 가운데 민족자결주의라 하는 여파는 조선 반도도 한동안 흔들어놓았다.

연실이가 몸을 풀은 뒤에 산후도 깨끗하여 삼 학기부터 학교를 가려고 준비할 때부터, 동경 유학생간에도 적지 않은 동요가 일었다. 제 삼 학기 초부터는 동요도 꽤 커갔다. 경찰로 붙들려가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연실이의 아기의 가정(假定) 아버지 되는 맹호덕이도 이런 일에는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끼리끼리서 밤을 새워가면서 수근거리며 돌아갔다.

조선의 신문학도(新文學徒)요 겸하여 조선의 연애 교사인 이고주도, 동경을 건너왔다가 무슨 글을 하나 지어놓고 재빨리 상해로 달아나고, 남은 사람들은 그 글을 인쇄하여 유학생간에 돌리고 모두 사법의 손에 붙들렸다. 독립선언서였다. 첫 봉화는 동경서 들리었다.

그러나 그 일은 연실의 생활이며 감정이며와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무슨 일인지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삼 학기를 시작하였다.

삼 학기도 끝나고 내일 모레면 졸업식이라 하는 삼월 초하룻날, 온 조선에는 무슨 중대한 일이 폭발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문학과 관계 없고 연애와 관계 없는 이상에는 역시 연실이의 아랑곳할 것이 못되었다.

졸업하고 곧 서울로 돌아가려던 예정이었다(고향인 평양 따위는 벌써 잊은 지 오랜 연실이었다). 그러나 조선 안이 꽤 소란스러운 듯하므로, 연실이는 그 음악학교에서 작곡과(作曲科)를 일년간 더하고 조선이 좀 안돈된 뒤에 돌아가기로 하였다.

삼월 초하룻날의 소란은 조선에 꽤 커다란 결과를 주었다. 사내(寺內) 총독의 무단정치(武斷政治)를 그대로 답습한 장곡천(長谷川) 총독은, 경성 시내에 장곡천정(長谷川町)이라는 정명(町名) 하나를 남겨놓고 갈려가고, 재등실(齊藤實)이 새 총독으로 오게 되었다. 그리고 삼월 초하루의 소란은 무단정치에 대한 반항이라 하여 문화정치라는 깃발을 내세웠다.

그 덕에 지금껏 탄압하던 출판계가 좀 완화되어 신문 잡지 그밖 서적들이 뒤이어 나타났다. 동시에, 신문학의 싹도 차차 완연하여갔다.

이러한 현상을 바라보는 연실이는 그냥 편안히 동경에 있을 수 없었다. 작곡과 일년간을 황황히 마친 뒤에 연실이는, 행장을 가다어듬가지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어린애는 '사도꼬'로 주었다.

어서 돌아가서 선각자의 자리를 남에게 앗기우지 않아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어린애 같은 것은 달고 다닐 수가 없었다. 온갖 방면으로 조선 선구녀형(先驅女型)의 표본인 연실이는, 자식에게 가질 모성애라는 것도 결핍된 사람이었다.

연실이가 서울로 귀환한 때는 조선에도 두어 파(派)의 젊은 문학도들이 생겨 있었다. 이 문학도들의 전기생(前期生)이요 겸하여 조선 연애 교수인 이고주는, 아직 상해에 피신해 있는 채 돌아오지 않았다.